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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이육사를 생각함

입력
2019.03.06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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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갛게 씻은 얼굴이 고운 해 같다. 곱게 탄 가르마, 둥근 안경 너머 선하면서도 강렬한 눈빛, 단아한 흰 한복 차림에서 선비의 기개가 느껴진다. 3ㆍ1운동 100주년을 전후해 쏟아진 보도 중에서 이 사진 한 장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많지 않은 그의 사진은 다 양복 차림인데, 한복 입고 찍은 사진이 발견돼 처음 공개된 것이다. 스물여덟 때 모습이라고 한다.

이른바 저항시인으로 불린 이들이 있었다. 한용운, 이상화, 심훈, 김영랑, 윤동주… 모두 국민 애송시를 남겼다. 그런데 그는 살아 있을 때 그 반열에 들지 못했다. 생전에 시집 한 권 내지도 못했다. 남긴 시도 36편뿐이다.

그의 해맑은 사진이 시심을 자극했다. 그의 시를 다시 꺼내 읽고 싶은 충동이 엄습했다. 3ㆍ1운동을 잊고 있던 것처럼, 그래 그동안 ‘광야’를 잊고 있었다.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데 닭 우는소리 들렸으랴//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끊임없는 광음을/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지금 눈 나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가 40세에 옥사할 때 아우가 수습한 유고다. 누구는 절명시(絶命詩)라고 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일까. 그의 시에는 이상한 기운이 서려 있다. 학창 시절부터 그의 시를 낭송하면 어떤 변화가 내면에서 일어나는 걸 느끼곤 했다. 시를 토설하는 순간 시어는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어떤 초월의 경지로 소환돼 가는 묘한 기분에 빠졌다.

‘님의 침묵’(한용운)이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도 있다. 조국 상실의 슬픔과 분노, 욕된 세월에 시나 쓰며 살아 있다는 부끄러움을 승화한 서정시들이다. 그러나 그의 시가 주는 느낌은 이와 확연히 다르다. 문학적 평가를 떠나 그의 대표시들은 고졸(古拙)하고 장엄하다. 서정 속에서도 초지일관 기개와 절개와 지조가 넘친다. 그의 시어는 독립과 광복을 은유하는 희망의 언어로 빛났고, 극복의 의지로 조탁됐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하지 않았고, 모란이 졌다고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울지도 않았고,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겼다고 한탄하지 않았다.

‘광야’만큼 절창인 ‘절정’을 읽는다. “(전략) 어데다 무릎을 끓어야 하나/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李陸史, 1904~1944). 대구형무소 수인번호 264에서 따온 필명(본명 이원록)에서부터 포스를 풍기는 시인이자 독립투사.

3ㆍ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해를 맞아 그를 각별히 생각함은, 그야말로 시와 삶이 일치했던 작가였기 때문이다. 당시 적지 않은 문인들이 변절 의혹을 받았지만 그는 글로, 그리고 행동으로도 일편단심 일제에 저항한 드문 문인이었다. 시에 바친 시간보다 국경을 넘나들며 항일에 몸을 바친 의열단원이었다. 마흔 생애에서 열일곱 번 옥고를 치렀다.

‘청포를 입은 손님’과 ‘백마를 탄 초인’을 기다린 그는 광복 한 해 전 추운 겨울날 베이징의 일본 헌병대 차디찬 지하 감옥에서 눈을 감았다. 눈을 부릅뜬 채였다고 한다. 그가 간 지 75년, 그의 시를 다시 꺼내 읽으니 왠지 죄스럽다. 빚진 느낌이다.

“우리는 서울 장안에서 만나/꽃 사이에 술 마시며 놀았니라/지금 너만 어디메에 가/광야의 시를 읊느뇨//내려다보는 동해 바다는/한 잔 물이어라/달 아래 피리 불어 여는 너/나라 위해 격한 말씀이 없네”(신석초, ‘육사를 생각한다’)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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