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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준 칼럼] 한국어의 영토

입력
2019.03.06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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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ㆍ현재 언어 동일 美日, 축적지식 방대

한글 기반 지식영토, 역사 짧고 총량 협소

한글로 쓰인 모든 글, 미래 지식의 寶庫

일본 유학 시절 메이지(明治) 유신 이래의 잡지와 신문들로 가득한 도쿄대(東京大) 도서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든 적이 있다. 일본 엘리트 학생들은 적어도 메이지 유신 이래 150여 년간 지식인 선배들이 축적한 각종 문헌들을 읽으며 미래를 준비하겠구나 하는… 메이지 유신 당시 고어(古語)가 현대 일본어의 표현 방식이나 문체와 달라 별도의 교육을 받아야 읽을 수 있지만, 고등학교에서 고문 정도를 배우면 뜻을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이전 도쿠가와 시대의 문헌까지 포함해 일본어로 읽을 수 있는 독서 범위는 우리보다 장구하고 광범위하다.

미국에서 두 차례 안식년 연수생활을 보낼 때 역시 장서로 가득한 그곳 대학 도서관에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미국 역사가 한국, 일본보다 짧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영어로 쓰인 문헌들의 역사는 한국어나 일본어의 그것보다 유장해서 셰익스피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시대 자료들을 포함해 19세기 이전 영어 문헌들까지 서가를 채운 하버드대 도서관들을 보면서, 영미권 학생들이 영어로 읽을 수 있는 문헌의 시간적 범위는 우리의 그것보다 훨씬 장구하고 주제도 다양하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반도의 지식인들이 한글로 자신의 생각을 본격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구한말 독립신문이 발간되던 시기부터가 아닐까. 이전 시대의 지식인들은 한글이 아니라 주로 한문으로 생각을 표현해 왔으므로, 현대 한국인들 입장에서 보면 외국어나 다름없다. 선배 학자들 중에는 한문 문헌을 줄줄 읽으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필자의 동년배 가운데 그런 능력의 소유자는 극소수다. 그래서 필자는 이 땅의 지식인들이 전통시대부터 영위해온 지식의 세계와 접점을 찾기 위해 영어 등 외국어 못지않게 한문 교육도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20세기 초 이래 본격적으로 사용된 한글 기반 지식의 세계에 놓여 있다. 한국어 기반의 지식 영토는 영어나 일본어, 혹은 중국어로 이루어진 지식 영토에 비해 상대적으로 역사도 짧고 총량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할 것이다. 여타 국가의 학생들에 비해 한국 학생들의 공부량이 과다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읽어야 하는 한국어 문헌의 세계는 여타 주요 언어들이 축적한 학문의 세계에 비해 용량 자체가 크지 않다.

그런 연유로 필자는 식민지 시대 이래 한반도의 지식인들이 한글로 생각을 표현해온 것, 예컨대 소설이나 시, 평론이나 학술논문 등이 한국어 지식의 영토를 개척해 온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자산들이 광범위한 영역에서 보다 풍부하게 축적되는 것이 미래 세대들에 대한 교육뿐 아니라 우리 문화를 풍성하게 하는 귀중한 투자가 될 것이다. 영어나 일본어로 축적된 지식의 영토가 광대하지만, 그 영토에서 찾을 수 없는 귀중한 성찰들이 한국어로 쓰인 지식의 영토에 담겨 있다면, 희귀 광물을 가득 품고 있는 광산처럼 한국어 기반 지식의 영토는 미래 세대들에게 결코 부끄럽지 않은 자산들이 될 것이다.

대학 강단에 선 연구자들은 강의 외에는 주로 학술논문 발표나 저서 집필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는 것이 상례다. 다만 필자는 학술적인 글 외에 시사칼럼을 쓰는 것도 사회에 대한 직접 공헌이 될 뿐 아니라, 한국어의 영토를 넓힌다는 점에서도 평가되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 점에서 한국일보에서 지난 2년간 귀중한 지면을 할애해 주어, 국제정치나 안보문제에 대한 생각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영광스러운 기회였다. 물론 한국어 지식의 영토에 어떤 성찰을 보태었는지를 감히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일본이나 미국 대학의 도서관 자료들에서 가끔 한 세기 전의 지적 사유들이 보물처럼 발견되듯이, 지금까지 써온 것들의 어딘가에 21세기 격랑에 처한 한반도 안보와 외교를 헤쳐나갈 수 있는 실마리들이 담겨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박영준 국방대 안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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