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예천 대구미용실
“몸이 불편해서 이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종종 들지만 찾아오는 친구들이 있고, 용돈 벌이라도 하니 그 재미로 문을 열고 있니더(있습니다).”
3일 경북 예천군 읍내에서 남쪽으로 40여㎞의 시골길을 돌고 돌아 풍양면소재지에 있는 재래시장에서 한 블록 지나니 옛날식 일본식 적산가옥 거리가 눈에 확 들어온다.문경ㆍ상주시와 인접한 이 거리 중간쯤 낡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 ‘대구미용실’ 간판이 소박하게 매달려 있다.
붉은 벽돌로 된 단층건물의 미닫이 문 앞에는 한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은 채 번개탄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미리 전화한 기자라고 말을 건네자 “아이구 신문이든 방송이든 낼 필요없는데 뭐할라꼬 먼데까지 왔니껴”라며 손사래를 친다. 할머니는 번개탄에 불이 잘 붙지 않는지, 손님이 와서인지 번개탄을 그대로 두고 스테인리스로 된 미닫이 문을 열고 미용실 안으로 들어선다.
할머니 미용사는 10대 후반에 미용기술을 익힌 후 시댁인 풍양면에 정착한 최말순(81)씨다. 10여㎡ 남짓하게 작디작은 미용실은 고관절 수술 후 지팡이를 짚어야 걸을 수 있는 할머니와 함께나이를 먹었다.꽃무늬 벽지에 베니어 합판을 댄 천정, 하늘색 소파와 낡은 의자, 한 구멍 짜리 연탄난로가 정겹기만 하다.개수대 수도꼭지 아래에는 꾀죄죄한 세숫대야가 있고 여러 종류의 샴푸와 비누가 싱크대 위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큰 거울이 하나 있는데 “미용실 개업할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미용대 옆 벽면에 내걸린 영업신고증 액자의 날짜가 1964년 7월27일로 적혀 있었다.거울은 55년 된 골동품이었다.
미용대 선반에는 자외선 살균 소독기와 빗, 작은 가위, 고데기, 갖가지 화장품과 미용재료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파마를 할 때 쓰이는 비닐장갑과 집게 롤, 부직포 조각, 파란바구니 등 재료도차곡차곡 쌓여 있다.
작은 방 안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방문 앞에는 여러 종류의 알록달록한 신발 10여 켤레가 흩어져 있다. 최 할머니는 “하루에 10명에서 많게는 20명까지 친구들이 찾아와 논다”고 했다. 60대에서 80대까지 할머니들이 이곳에 모여 화투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점심은 물론 저녁 식사까지 해결하고 집에 가는 할머니들이 많다.할머니는 “내가 혼자 살아서인지 모두들 여기 오면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며 활짝 웃었다.최 할머니의 말동무이자 고객인 셈이다.
그 친구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동갑계를 하던 친구가 43명이었는데 이제 10명으로 줄었다. “자주 오던 친구가 열흘쯤 안보여서 물어 보면 교통사고나 병으로 갑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곤 한다”고 말했다.
파란만장한 미용 인생
구미가 고향인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대구의 ‘영남고등기술학교’에서 미용 기술을 배운 것이 미용인생의시작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19세 꽃다운 나이에 오빠가 사는 의성군 안계면의 미용실에 취직했다.풍양면과 인접한 곳이다. 5,6개월 일할 무렵 해군으로 군복무 중인 남자를 만났지만가난한 집의 장남과 사귄다는 소식에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둘은 편지로 인연을 이어갔고 군을 제대한 남자는 반대하는 최 할머니 집을 찾아가 자살극을 연출하는 열성을 보여 결국에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나이 스물 두살 때다.
풍양은 시집이었다.풍양에는 시아버지 시어머니는 물론 시할아버지와 시동생 넷, 시누이 등 모두 열 명의 식구들이 방 두 칸에 모여 살았다. 흥부네 집 같았다. 호롱불로 밤을 밝혔고, 아궁이에 왕겨를 넣어 풍로로 불을 때 밥을 지었다. “생전 처음 해 본 일이라서 한꺼번에 등겨를 많이 넣고 풍로를 돌리자 속이 터져 머리카락에 불이 붙은 적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시아버지는 술주정이 심했고, 시어머니 마저 속이 상해 술을 마셨다. 건설업을 하던남편도 사업이 잘되지 않자 술에 빠져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살림살이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주유소를 운영하며 가정부를 들일 만큼 넉넉한 가정의 막내딸로 자란 최 할머니의 시집살이는 고될 수 밖에 없었다.1964년 가난한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당시 시장 바닥이던 이곳에 미용실을 차렸다. 미용실 일이 끝나면 화장품 외판, 보험 외판 심지어 가전제품 외판까지 억척스레 일했다. 딸과 아들 둘이 태어났다. 그나마 그에게살아갈 희망이 생겼다.
하지만 자본금 없이 사업을 한 남편은 늘빚에 쪼들렸고 어려울 때 마다 최 할머니가 구원투수가 됐다.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장사가 잘돼 푼푼이 모아 두면 뭉칫돈으로 나가니 돈이 모이지 않았다.
그에게 또 다른 어려움이 닥쳤다. 시동생이 아이 셋을 남겨 두고 세상을 등진 것이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마저 집을 나가자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자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어 거둬 키웠다. 어떤 손님이 아이 셋을 데리고 잘 곳이 없다며 미용실을 찾은 적이 있었다. 측은한 마음에 밥을 해 먹이고 함께 잔 후 일어나보니 아이 셋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아이들을 놔두고 도망간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이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시동생 아이 중 장애를 가진 막내는 딴 세상으로 갔지만 하루밤만에 생긴 세 아이까지 모두 키워 결혼까지 시켰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역경은 끊이지 않았다.1989년 스물 다섯의 작은 아들이 오토바이 타고 친구들을 만나러 가다가 사고로 죽었다. 2004년에는 큰 아들마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결혼해 아이 셋을 둔 마흔 한 살의 큰 아들은 건설공사 책임자로 일하던 중 폭우에 건설자재를 살피러 급하게 공사현장으로 가던 중이었다. 차가 빗길에 미끄러져 낭떠러지에 굴렀다.
통곡으로 나날을 보내던 그는 갑상선 이상으로 수술까지 받았다. 남편마저 두 아들을 잃은 슬픔에 삶의 끈을 놓아 버렸다. “남편을 뒤따를 생각이 왜 없었겠나. 홀로 남은 며느리와 손주들을 바라보니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며 회한에 젖었다.
30대까지는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고, 겨우 자리잡을 때쯤인 40대 이후에는 두 아들과 남편을 잃었다.
미용실은 삶의 동반자
모진세월을 이기게 해 준 동반자가 바로 미용실이었다. 그의 아픈 사연을 아는 이웃 친구들이 걱정되어 발길을 하다가 지금의 사랑방이 되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낙동강 인근 풍양은 참깨, 파, 쌀, 무 등 농산물이 풍부해 부자동네로 이름났다. 술집도 즐비해 한 때 ‘술집색시’가 80여명이나 될 정도로 흥청거렸다. 이들은 머리손질에서부터 얼굴화장도 하고 화장품을 사가기도 했다. 그러면서 단골이 하나 둘씩 늘었다. 최 할머니의 미용실은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파마머리 800원할 때부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미용 일을 하다 보니 에피소드도 많다.어느 장날 한 아주머니는 파마를 하면서 머리에 롤을 말고는 “장을 보고 온다”고 나간 후에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간질병 환자가 미용실 바닥에 쓰러져 난리를 친 기억도 잊을 수 없다. 정신장애 환자인지 모르고 파마를 해 주다가 머리끄덩이를 잡혀 끌려 다니기도 했다. 남편이 장을 보고 온 손님 보따리를 버스에 실어주곤 했던 추억도 잊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하면 자꾸만 웃음이 나와 참을 수가 없다.
최 할머니는 “올림머리, 혼주머리는 최고로 잘했지. 파마한 머리가 이틀이 지나도 흐트러지지 않아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자랑했다. 10여년 전까지 면소재지에 있던 예식장 두 곳의 손님들을 도맡았을 정도다. “다들 손님얼굴에 맞게 머리손질을 해 주는 솜씨가 있다며 찾아왔다”고 한다.
요즘 면소재지에는 30, 40대 젊은 미용사들이 운영하는 미용실이 4곳이나 된다. 시설부터 다르다. 간판, 바닥타일, 화장실, 내부공간 구성 등 인테리어부터 현대식이다.경쟁 대상이 아니다.
젊은 미용사들을 따라가기 힘든 것은 시설보다 ‘미용재료’와 ‘유행’이란다. 염색약부터 수많은 종류의 가위와 빗, 헤어핀, 헤어기계, 보조용기구 등을 다 갖출 수가 없고 새로운 기구를 하나하나 배워서 쓸 재간도 없다. 파마나 염색, 커트 등 기본적인 미용기술은 아직 최고라고 자부하지만 세월 따라 변하는 머리스타일은 따라잡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이 요구하는 머리모양을 내는 건 불가능하다. 그는 “친구들도 혼사 등 큰일이 있을 때는 젊은 미용사들을 찾아 가기도 한다. 10년 전만 해도 마음이 불편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고 말했다.
이제는 두 다리 모두 고관절 수술의 후유증으로 한몸 지탱하기도 벅차다. 딸과 며느리, 손자 셋 그리고 친구들이 찾아와 줘서 모진 세월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나이가 있다보니 처음 찾는 손님은 최 할머니가 미용사인줄 모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최 할머니는 “젊은 새댁(시골에서는 50대까지도 새댁으로 부른다)들이 머리를 하러 와서는 나보고 ‘미용사가 없느냐’고 묻기도 한다”며 “내가 미용사라고 하면 미심쩍어 하는 표정을 짓기도 해서 이제는 그냥 없다고 내보낸다”고 했다.
요즘최 할머니의 미용실에 머리를 하러 오는 이는 하루 3∼5명의 친구들이 전부다. 머리손질에 3,000~5,000원, 파마를 하면 2만원 받는다. 그저 반찬값이나 손자 용돈벌이라도 하고 싶어 문을 연다.
여든을 넘은 나이지만 평생 쉬어 본 적이 없다.놀면 더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손자 셋을 보면 힘이 난다.며느리도 대학원까지 졸업할 만큼 삶에 열정적이다. “지금도 생일마다 봉투에 용돈을 넣어주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흐뭇해했다.
최 할머니는 “성인이 다 된 손자들이 잘 자라줘서 고맙고, 어디를 가나 칭찬을 듣는 며느리를 보면 위안이 된다”며 “손자들 결혼시킨 후 미용실과 함께 잠 자듯 조용히 세상 뜨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예천=글·사진 이용호기자 ly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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