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극장가에 조용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작품이 있다. ‘칠곡 가시나들’이라는 다큐멘터리다. 멀티플렉스(CGV, 메가박스)의 불공정한 배급에 보이콧을 선언한 이 영화는, 개봉 첫 주를 마친 3월 3일 현재 약 2만3,000명의 관객과 만났다. 연출자는 김재환 감독. ‘트루맛쇼’(2011) ‘MB의 추억’(2012) ‘쿼바디스’(2014) ‘미스 프레지던트’(2017) 등의 전작들이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고발과 비판의 영상들이라면 ‘칠곡 가시나들’은 다르다. 이렇다 할 테마나 기교도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감독의 이전 작품들보다 깊은 울림이 있다면 그건 ‘인물’들, 경상북도 칠곡에 살고 있는 80대 ‘가시나’들의 힘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다큐멘터리 신에서 노인은 매우 중요한 존재다. 주요한 국면마다, 그들은 중심적 인물이었다. 요즘은 1년에 20~30편씩 극장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날 수 있지만, 20여년 전만 해도 극장에서 다큐를 본다는 건 매우 생소한 일이었다. 이때 금기를 깬 영화가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1995)였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을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린 이 영화는 다큐로선 이례적으로 극장 개봉을 통해 대중과 만났고, 이후 3부작으로 완성되었다.
‘낮은 목소리’가 포문을 열었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이때 김동원 감독의 ‘송환’(2004)이 선댄스영화제에서 ‘표현의 자유상’을 수상했다.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삶을 다룬 이 작품은 한국 다큐멘터리의 국제적 위상을 다졌다. 그리고 ‘워낭소리’(2009ㆍ이충렬)와 함께 극장 개봉 다큐멘터리는 급속히 늘어난다. 전국 관객 약 300만명의 엄청난 관객을 동원한 이 영화는 ‘소와 노인’에 대한 풍경화였다. 그리고 노부부의 순애보를 그린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ㆍ진모영)는 480만명의 관객수로 ‘워낭소리’의 기록을 넘어섰다. 최근 한국 다큐 역사의 분기점마다 노인이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다큐들이 대중에게 호소력을 지니는 건 그들이 감내했던 ‘세월’의 힘 때문이다. 세월이 품은 그들의 사연은 감동을 준다. 그들에겐 감추고 싶었던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고, 절대로 꺾을 수 없는 신념이 있다. 소와 함께 늙어가는 자의 깊은 주름과 76년을 해로한 부부의 다정한 모습은, 그 어떤 이미지보다 심금을 울리는 스펙터클이다. 극영화에선 주로 조연이나 단역으로 취급되고 전형화되기 일쑤인 노인 캐릭터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셈이다.
‘칠곡 가시나들’은 할머니들이 문맹을 벗어나는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글 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들은 그렇게 평생 글을 모르며 살아왔다. 8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까막눈을 벗어난 할머니들은 생전 처음으로 간판 글씨도 읽고 시도 쓰고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이것은 단순한 학습의 과정을 넘어선다. 뒤늦게 뭔가 표현하게 된 사람들이 삶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글자를 아니까 사는 기 더 재미지다.” “몸이 아프면 빨리 죽어야지 시푸고 재밌게 놀 때는 좀 살아야지 시푸다. 내 마음이 이래 와따가따 한다.” 소리 나는 대로 표기된 사투리 문장들은, 맞춤법이나 표준말과 상관없는 내면 그대로의 소리다.
흔히 ‘백세 시대’라고 하지만, 과연 우리에겐 그 긴 세월을 살아나갈 콘텐츠가 있을까. 우리 ‘젊은’ 사람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늙어갈 것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막막한 질문 앞에서 ‘칠곡 가시나들’은, 그리고 노인의 목소리를 담은 다큐멘터리들은 작은 가르침들을 준다. 그리고 칠곡의 할머니들처럼 나이 들어서도 하루하루 즐겁게,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늙는 것이 두렵지 않을 것 같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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