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줄 알았으면 선생의 유품을 그냥 중국에 두는 게 더 나았을 것 같아요. 차라리 북한으로 보내든가.”
최근 독립운동가 류자명(1894~1985) 선생 재조명 사업에 발벗고 나선 충북 충주 지역의 한 시민단체 대표가 던진 넋두리이다. 우리 독립운동가 유품을 누가 어쨌길래 이런 소리를 할까. 사연을 이해하려면 먼저 류자명 선생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야 한다.
충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1919년 충주농업학교 교사 재직 당시 계획한 만세운동이 일경에 발각되자 중국으로 망명한다. 무장 항일투쟁에 뜻을 둔 그는 조선의열단에 가입해 비밀참모로 활약했다. 탁월한 아나키즘 이론가였던 그는 의열단 투쟁 이론을 정립한 인물로 평가된다. 의열단 선언문인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1923)’에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고 집필을 도왔다. 의열 투쟁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1926년 일제밀정 처단과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회사 폭탄 투척은 그가 기획하고 주도한 쾌거이다. 1940년대 들어 선생은 해외 한인 혁명세력의 통합에 집중했다. 이념과 노선 차이로 사분오열된 독립운동 세력을 상해임시정부 중심으로 규합하는 데 앞장섰다. 중국 전 역을 무대로 항일투쟁을 이어가다 귀국 시기를 놓친 그는 중국에 남아 농학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그가 교수로 재직한 후난(湖南)농업대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과 기념관이 있다. 중국의 대문호 바진(巴金)은 선생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 이런 선생에게 북한은 3급 국기훈장(1978년)을 수여했고, 남한에서는 건국훈장 애국장(1991년)을 추서했다. 선생은 이렇게 남한과 북한 양쪽에서 훈장을 받은 유일한 독립운동가로 기록됐다.
그러나 아나키즘에 대한 편견과 중국 공산당 치하의 활동 등을 이유로 선생의 생애와 항일운동 업적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상당 부분 베일에 가려져왔다.
잊혀가던 선생을 조명하자는 운동은 그의 유해가 봉환돼 국립현충원에 안장(2002년)된 즈음 고향 충주에서 시작됐다. 지역 학계와 언론이 그의 항일투쟁 활동을 집중 조명하자 충주시가 적극 거들고 나섰다. 시는 2003년 선생 이름을 건 국제학술세미나를 열고, ‘류자명 평전’을 발간했다. 2006년엔 중국을 방문, 선생의 중국 유족들로부터 육필원고 등 유품 200여점을 받아왔다. 당시 충주시는 류자명 전시관 건립과 생가 복원을 조건으로 유품을 기증받았다.
하지만 이후 충주시장이 바뀌면서 전시관 건립은 ‘없던 일’이 돼버렸고, 대부분의 유품은 13년째 시박물관 수장고에 처박혀 있다. 생가 복원도 10년이 넘도록 아무런 진척이 없는 상태다. “유품을 희사한 유족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단체장이 바뀐다고 독립운동가 기림 사업까지 뒤집냐”는 비판이 일었지만, 충주시 측은 눈도 꿈쩍하지 않고 있다.
그러자 보다 못한 지역 시민단체가 류자명 재조명 사업에 직접 뛰어든 것이다. 이 단체는 의열단 창단 100년, 상해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서훈등급 상향, 전시관 건립, 한중일 공동 무크지 발간 등 류자명 기념 사업을 연초부터 본격화했다. 마침 남북화해 무드를 타고 이념과 사상을 초월한 선생의 업적이 새삼 주목받는 터라 사업 추진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그러나 이번에도 지자체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손을 놓고 있다고 한다. 시민단체가 중앙 부처에 서훈등급 상향을 촉구하는 과정에서 충북도와 충주시는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았다. 전시관 건립에 대해서도 충주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고장의 독립운동가를 기리고 빛내는 일은 지자체의 임무이자 의무지요. ‘역사광복’에 앞장서야 할 주체가 이를 등한시한다면 존재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민단체 대표의 돌직구 발언을 곱씹어보길, 3ㆍ1운동과 임시정부 100년 기념 행사로 정신이 없는 전국 지자체에 ‘감히’ 권해 본다.
한덕동 대전본부 부장 dd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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