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과정 공언에도 공모제 잇단 잡음
집권 세력 조급증이 무리수와 타락 초래
100년 집권하려면 도리 어긋나지 않아야
20년을 넘어 100년에 이르게 된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장기 집권론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절차적 정당성이 보장되는 한 무릇 정당이 갖지 못할 꿈이겠는가. 오만하다거나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로 치부하는 야당의 반발과 달리 오늘의 정치, 사회 문제는 오히려 집권세력이 장기 집권 자세와 준비가 돼 있지 않은 결과로 보인다. 임기에 쫓기는 집권세력의 조급증과 근시안적 사고가 무리수와 정치적 타락을 낳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진 DJ정부 말기 각종 게이트 사건이 봇물 터지듯 할 때 “언제 또 정권 잡겠냐”는 생각이 부패의 원인이란 우스갯소리가 시중에 돌았듯이 말이다.
9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루고 보수정권 적폐 청산을 쇄신의 기치로 내걸었던 이 정부가 임기 중반도 지나지 않아 신적폐 소리를 듣고 있다. 특히 인사 문제에서 그렇다. 아래 위 할 것 없이 자리를 마련하다 전 정권보다 더한 낙하산 인사라는 말을 듣더니 급기야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에 휩싸였다. 청와대 대변인은 ‘체크리스트’라고 주장하지만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은 이제 관용어가 되다시피 했다. 환경부 산하기관 블랙리스트 의혹 중심에 있는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은 이 정권의 직권남용 처벌 1호 장관이 될 것이란 말이 검찰 안팎에서 무성하다. 국회에서 “나는 임명 권한이 없다”고 했던 그의 말에 비춰 찍어내기나 석연치 않은 재공모 과정에 청와대 인사의 관여가 어느 수준까지 이르렀는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비단 이뿐이랴. 공공기관 임원 공모제 파열음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장 응모자 역량평가에서 합격자가 나왔지만, 문화체육관광부가 돌연 재평가를 실시해 역량평가에서 탈락했던 진보계열 미술계 인사가 뽑히자 한 응모자가 실명을 걸고 불공정성을 성토했다. “촛불혁명 정부가 내세운 정의와 균등의 철학이 시험 받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문체부는 “절차상 문제가 없다”는 말만 할 뿐 합리적 설명을 하지 못한다. 진보단체인 문화연대가 “문체부의 인사실패”나 “관료주의” 탓을 하는 비판성명을 내놓았으나 전례가 없었다는 공모절차 파행이 과연 문체부 선에서 이뤄진 일인지 궁금하다. 여러 공공기관에서 이뤄진 재공모 사태가 세간의 의심처럼 이 정권이 원하는 인사를 꽂기 위한 공모제 무력화라면 보통 일이 아니다. 낙하산 인사나 찍어내기가 이 정부만의 일이냐고 항변할지 모르나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 큰소리쳤던 정권의 허언증이 도마에 오를 게 분명하다.
지금 집권세력의 문제는 말로만 ‘100년 집권’ 운운할 뿐 ‘내일이면 늦으리’라는 조급증에 사로잡혀 순리보다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따지고 보면 고용문제, 소득문제 역시 조급증의 산물이 아니겠는가. 통계만 나오면 고용참사, 소득참사라는 말이 예사로 쓰이고, 안타깝게도 그 ‘참사’의 직격탄을 서민층이 맞고 있는 터다. 소득주도성장을 주도한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무슨 의도인지 최근 고려대 정년퇴임식장에서 “현실에 뿌리내린 이상주의자이고 싶었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소회를 밝혔다고 한다. 이 정책이 임기 내 빛을 볼 지 속단하긴 어렵지만 “소득분배 악화에 밤잠을 설친다”는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의 토로는 서둘러 시행된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가족의 원수를 갚으려고 쳐들어간 초나라에서 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에 300대 매를 때린 오나라 관리 오자서에 얽힌 춘추시대 고사다. 친구가 천리에 어긋나는 일을 했다고 비난하자 오자서는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이 멀어 도리에 어긋난 일을 했다(日暮途遠 故倒行而逆施之)’는 말을 남겼다. 5년 임기에 성과를 내기는 쉽지 않아도, 타락하기엔 꽤 긴 시간이다. 100년을 꿈꾸는 집권세력이라면 ‘날이 저물고, 갈 길은 멀어도’라는 자세부터 가져야 마땅하다.
정진황 뉴스2부문장 jhch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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