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이슬람 제국의 전쟁, 농업기술과 제지술을 유럽에 전파 시키다
※ 이슬람 국가 모로코에서 이슬람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정명 명지대 교수가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이슬람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매주 들려드립니다.
역사를 보다 보면 의도치 않은 사건이 전혀 예상치 못한 엄청난 결과를 낳는 경우가 종종 있다. 중세 기간 동안 건축술, 화약 제조술, 체스, 커피 등 많은 실용적 기술과 물건이 이슬람 루트를 따라 유럽으로 전파됐다. 특히 이 가운데 농업기술과 제지술은 유럽인의 생활을 바꾸는데 엄청나게 큰 기여를 했다. 그런데 두 기술이 유럽으로 건너 간 계기는 엉뚱하게도 우마이야조, 압바스조, 당나라 등 당시 이슬람 세계와 중국을 대표했던 거대 제국 간의 전쟁과 패권 다툼이었다.
◇패망 후 스페인으로 도망 간 우마이야조, 유럽에서 농업 혁명을 일으키다
중세 기간 동안 이슬람 세계의 선진 과학과 실용 기술이 유럽으로 전파된 주요 경로는 스페인 남부 지역인 안달루시아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안달루시아 지역이 동‧서양의 문명 교류 중심지로 급부상한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두 이슬람 왕조가 벌인 전쟁과 패권 경쟁이었다는 것이다.
안달루시아 지역은 711년부터 1492년까지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곳을 처음 정복하고 다스린 이슬람 왕조는 우마이야조였다. 원래 우마이야조는 661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건설됐는데, 750년에 압바스조(750~1258)와 벌인 잡(Zab) 전투에서 패해 한 세기도 안 돼 멸망하고 말았다. 압바스조는 다마스쿠스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했고, 이 때 우마이야조의 어린 왕족이었던 압둘 라흐만 1세는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서쪽 땅 끝인 안달루시아로 도망쳤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는 지지 세력을 모아 756년에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새롭게 후기 우마이야조(756~1031)을 개창했다. 이후 약 300년 동안 우마이야조와 압바스조는 이슬람 세계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대립했다.
압둘 라흐만 1세는 안달루시아에 정착해 왕조를 재건하는데 성공했지만 압바스조로부터 당한 패망의 아픔과 설움을 평생 기억에서 지울 수 없었다. 그는 항상 떠나 온 동방의 고향을 땅을 그리워했는데, 어느 날 궁정에 있는 야자수 한 그루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루사파 궁 한가운데 보이는 야자수 한 그루/ 본향에서 멀리 떨어져 서쪽 땅에 있네/ 고향을 떠난 너의 나그네 신세/ 우리 백성, 내 가족과 멀리 있는 나와 같구나….” 압둘 라흐만 1세 이후 우마이야조의 통치자들은 늘 가슴 한 구석에 압바스조에 대해 열등감을 품고 있었고, 이를 떨쳐내기 위해 압바스조에 버금가는 대규모의 모스크, 궁전, 도서관 등을 건립하고 선진 과학, 의학, 철학 등을 육성하는데 열을 올렸다.
압바스조를 앞서야 한다는 후기 우마이야조 통치자들의 강박 관념은 요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들은 압바스조 칼리파가 즐겼던 고급 요리를 안달루시아 땅에서도 반드시 즐길 수 있어야 위신이 선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예로부터 스페인에 알려지지 않았던 작물을 수집하고, 소개하고, 적응시키고, 재배하는 농업 기술 개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원래 척박한 사막 지역에서 살았던 아랍 무슬림들은 적은 양의 물로도 작물을 효율적으로 재배할 수 있는 농업 기술을 갖고 있었다. 먼저 우마이야조는 페르시아에서 기원한 ‘카나트’라고 불리는 지하수로를 팠고, ‘사키아’라고 불리는 수차(水車)를 도입하여 물을 농지에 공급하는 대규모 관개 인프라를 건설했다. 또한 안달루스의 무슬림 군주들은 현지에 적합한 농업서 편찬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이슬람 통치 기간 안달루스 지역에는 아프리카, 인도, 페르시아, 중국 등 세계 각지로부터 쌀, 사탕수수, 면화, 수박, 가지, 오렌지, 레몬, 망고 등이 처음 도입 되었다. 농업 분야에서 무슬림들이 이룩한 업적의 흔적은 오늘날 스페인어에도 남아있는데, 수문(azuda), 용수로(acequia), 수차(noria), 물방아(aceña) 등과 같은 스페인 단어들은 모두 아랍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패망의 치욕을 맛본 우마이야조는 절치부심 끝에 변방의 척박한 안달루시아 땅을 비옥하게 바꾼 농업혁명을 일으켰고, 마침내 수도 코르도바를 인구 45만 명을 가진 유럽 최대의 도시로 성장시켰다.
◇압바스조, 고선지가 이끈 당나라 군대와 탈라스에서 맞붙다
제지술이 유럽에 전파되게 된 계기도 농업 기술만큼이나 엉뚱한 사건에서 발단됐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이슬람 세계와 당나라 간에 벌어진 탈라스(Talas) 전투였다. 750년 우마이야조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이슬람 제국을 건설한 압바스조는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는 동진 정책을 꾀했다. 때마침 중국의 현종이 다스렸던 당(唐)나라 역시 서역 개척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결국 두 거대 제국은 751년 7월~8월 사이에 지금의 카자흐스탄 영토인 탈라스 강 유역에서 중앙아시아 패권을 놓고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탈라스 전투는 우리 민족과도 인연이 깊다. 탈라스 전투를 이끈 당나라 원정군 사령관이 고구려 유민 출신의 고선지(高仙芝)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멸망 이후 많은 고구려인들이 노예 신세가 되어 당나라로 잡혀갔는데, 이때 고선지의 부친도 당나라에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패망한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난 고선지는 자신이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군인이 되어 공을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군인의 길을 걸은 고선지는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그는 토번국(티베트)을 격파하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투르키스탄과 당시 ‘석국’이라 불리던 타슈겐트를 정벌하는데도 성공했다. 그러나 당나라군을 이끌고 탈라스 전투에 나섰다가 연합 세력이었던 튀르크계의 카를루크(karluk)족의 배반으로 압바스조 군대에 대패하고 말았다.
◇탈라스 전투, 이슬람 세계와 유럽에 종이를 전파 시키다
탈라스 전투는 역사적으로 큰 획을 그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탈라스 전투를 통해 제지술이 서방으로 전파되어 세계 문명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당시 고선지 장군이 이끌고 출정한 당나라 군대는 총 7만 명에 달했고, 그 가운데 5만 명이 죽고 2만 명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인 포로 가운데는 종이 제조 기술자가 섞여있었는데, 이들을 통해 제지술이 역사상 처음으로 동아시아 이외 지역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이는 후한(後漢) 시대 환관이었던 채륜(蔡倫)이 105년 무렵에 처음 발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탈라스 전투 이전까지 세계적으로 종이 제조술을 보유한 나라는 중국 외에 한국과 일본 정도였다. 8세기 이전까지 이슬람 세계와 유럽은 종이의 대체품으로 파피루스와 양피지를 필사 재료로 사용했다. 수초(水草)의 줄기에서 껍질을 잘라 압착한 후 말려 만든 파피루스는 가벼워서 휴대하기 간편했지만 쉽게 부서지는 단점이 있었다. 한편 양, 소, 사슴 등 동물의 가죽을 사용하여 만든 양피지는 파피루스에 비해 훨씬 쓰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내구성이 강했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단점이 있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성경 한 권을 옮겨 적는 데 양 500마리 분의 가죽이 필요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종이는 파피루스나 양피지의 문제점들로부터 자유로웠고, 구입과 운반이 쉬워 대량의 서적을 빠르고 값싸게 출판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당시 종이는 현대의 컴퓨터만큼이나 혁명적인 새로운 지식의 저장과 전달 수단이었다.
정말로 탈라스 전투에서 잡힌 중국인 포로를 통해 제지술이 이슬람 세계로 전파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이 그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이유는 전투가 끝나고 6년이 지난 757년 무렵 탈라스 강에서 가까운 사마르칸트에 제지 공장이 세워져 동아시아 이외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종이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지술은 곧바로 사마르칸트에서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를 비롯한 이슬람 세계의 주요 대도시로 빠르게 확산됐다. 800년 무렵 제지술은 이슬람 루트를 따라 이집트로 전파됐고, 이곳에서 다시 북아프리카 일대와 모로코를 거쳐 950년경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후기 우마이야조가 통치하고 있었던 스페인으로 전파됐다. 이후 제지술은 다시 시칠리아를 거쳐 이탈리아로 건너갔고 1239년에는 볼로냐에 제지 공장이 세워졌다. 제지술의 전파는 이슬람 세계와 유럽 모두에 엄청난 혜택을 주었다. 압바스조는 제지술이 도입된 지 한 세기 후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문예 부흥이 일어나 중세 이슬람 문명의 황금기를 맞이했고, 유럽 역시 제지술을 받아들인 직후에 암흑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 화려한 르네상스의 시기를 꽃피웠다.
김정명 명지대 아랍지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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