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게 무장한 갑옷을 입은 남성의 손에 왕관이 들려있다. 그의 시선은 왕관이 아닌 바래고 해진 옷을 입은, 헐벗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거지 소녀’에게 온통 쏠려있다. 정작 소녀는 왕관을 든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듯, 시선을 외면한 채 캔버스 너머를 응시한다. 소녀의 손에는 ‘사랑의 괴로움’이라는 꽃말을 가진 아네모네가 들려있다.
영국의 화가 에드워드 번 존스가 1883년 그린 ‘코페투아왕과 거지소녀’(King Cophetua and the Beggar Maid)는 엘리자베스 1세 시절 민요에 근거한다. 평생 여성에게 관심이 없던 옛 아프리카의 코페투아 왕은 어느 날 거리에서 예쁜 거지 소녀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리고 거지 소녀와 왕좌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성군이었던 코페투아 왕은 나라 대신 사랑을 택하고 그녀와 결혼한다.
동화에서처럼, 거지소녀와 왕은 평생 행복했을까. 낭만적 사랑이 끝나고 지루한 결혼 생활이 찾아오진 않았을까. 너무나도 다르게 살아 온 서로에 대한 환멸과 부조리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201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의 소설집 ‘거지 소녀’는 디즈니 식 판타지와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 준다.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ㆍ민은영 옮김
문학동네 발행ㆍ396쪽ㆍ1만 4,500원
표제작의 주인공은 장학금을 받고 지방대에 진학한 시골 출신의 수재 여성 로즈. 자신에게 첫눈에 반한 백화점 체인의 후계자 패트릭과 사랑에 빠진다. 통속 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둘은 다른 세계에서 왔다. “우리는 너무 다른 세계에서 자랐어. 우리 가족은 가난해.”(로즈) “나는 네가 가난해서 좋아. 너무 사랑스러워. 코페투아왕과 거지소녀 같잖아.”(패트릭) 로즈는 그런 패트릭에게 환멸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패트릭을 향해 휘두를 권력을 쥐고 있다는 사실에 허영을 느낀다. 패트릭과 헤어진 뒤 똑똑하고 가난한 여성으로서 혼자 헤쳐나가야 할 팍팍한 삶에 겁을 먹는다. 로즈는 결국 결혼이라는 선택지로 도피한다. ‘행복에 대한 환상’을 얼마간은 지니고서.
‘거지 소녀’는 일종의 연작 소설이다. 수록된 단편 10편의 주인공이 전부 로즈다. 지방 소도시의 가난한 집안 태생인 로즈의 유년부터 중년까지 40년에 걸친 시절을 다룬다. 과묵한 아버지, 애증의 새어머니, 무능력한 남동생으로 구성된 가족의 맏딸로 태어나 영악한 여자로 성장하는 로즈의 이야기, 그리고 패트릭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로즈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장편소설로도 읽을 수 있지만, 소설 하나하나가 각각의 미학적 성취를 거두는 단편집이기도 하다. ‘단편소설의 형식’에 ‘장편소설의 내러티브’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형태가 탄생한 것은 먼로의 이력 때문이다. 그는 ‘단편만을 써온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을 리 없다’는 편견을 깨고 노벨상을 수상했다. 1968년 데뷔해 첫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으로 캐나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총독문학상을 수상하며 유명세를 얻자 출판사들은 먼로에게 장편을 써볼 것을 제안했다. 이후 갈등과 협의의 과정에서 일종의 연작소설의 형식을 한 ‘거지 소녀’가 나왔다. 때문에 소설은 첫 장부터 순서대로 읽어도, 중간을 펼쳐 읽어도 제각기의 문학적 즐거움을 준다. 먼로는 이 작품으로 총독문학상을 두 번째로 수상했고, 부커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국내에는 초역됐지만, 먼로의 소설 중에서도 비교적 초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후 먼로의 작품 세계에 집중적으로 반복, 변주되는 ‘체념적 동화를 강제하는 시골 공동체’와 ‘거기에서 벗어나려 안간힘 쓰는 여성 인물’이라는 주제와 인물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가난한 소도시의 장녀로 태어나 장학금을 받고 영문과에 진학했지만 일찍 결혼해서 아이가 자는 틈에 글을 써야 했던 먼로의 인생과 겹쳐 읽히기도 한다. 가난과 불륜 등 통속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자기 도취와 연민에 빠지지 않고 냉소적으로 관조하고 이야기하는 먼로 특유의 화법은 초기작부터 변함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