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 관련 필독서로 꼽히는 ‘장인: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의 저자 리처드 세넷은 사회학자이자 노동 및 도시화 연구의 권위자다. ‘아르티장’의 저자 유승호 역시 사회학자다. 스테디셀러인 ‘공예란 무엇인가’의 저자 하워드 리사티는 미술사학자이며, 가장 많이 인용되는 공예 이론서인 ‘공예의 발명’, ‘공예로 생각하기’를 저술한 글렌 아담스도 미술사학자다.
이미 사망 증명서가 발행됐다고 생각되던 공예의 부활에 앞장서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사회학과 미술사를 전공하는 영미의 석학들이다. 이들은 이 시대의 사회와 예술이 가진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공예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공예는 우리 삶에 왜 필요한가?
짧은 지면에 석학들의 결론을 요약할 수는 없지만, 필자는 시민들에게 공예가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이유 세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로 공예품을 쓴다는 것은 나의 얼굴과 목소리를 찾는 행위다. 산업과 미디어의 발달은 우리 모두를 ‘같게’ 만들었다. 이제 개인은 유권자, 소비자, 납세자, 시청자와 같은 보통명사로 존재한다. 보통명사 앞에서 개인은 같아진다. 이 ‘같음’은 욕망의 같음, 취향의 같음을 의미한다.
개별성이란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타인의 인정을 통해 규정된다. 아무리 고유한 사고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사고를 통해 드러나는 생활, 즉 먹는 것, 입는 것, 사용하는 것이 타인과 동일하다면 개별적인 존재라고 믿기 힘들다. 모두가 같은 브랜드의 옷, 같은 브랜드의 집, 같은 브랜드의 물건을 쓰는 모습에서 그 사람만의 고유한 얼굴과 목소리를 구별하기란 몹시 힘들다. ‘일품(一品)’을 특성으로 하는 공예품은 내 취향의 다름을 확인하고 드러내는 유용한 도구다.
두 번째로 노동의 가치다. 20세기는 인간에게서 노동을 분리시키는 시기였다. 오랜 기간을 거쳐 20세기에 이르자 드디어 노동은 천한 것, 값어치 없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현대미술이 득세한 이후에는 예술마저 노동을 분리시키는 현상을 보였다.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나 데미안 허스트의 ‘살아 있는 자의 마음 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에서 노동의 흔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블루칼라보다 화이트칼라가 대우받았던 것은 단지 임금의 차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사회학자들의 분석처럼 노동의 분리는 인간성과 일상의 행복을 상실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공예는 ‘노동’을 기반으로 존재한다. 공예의 회복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버렸던 노동의 회복이며 이는 곧 일상이 주는 행복의 회복을 의미한다.
세 번째는 과정의 가치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말은 적어도 현대사회에서는 거짓말에 가깝다. 과정의 가치는 결과의 가치에 복속되었지 그 자체로 분리되지 못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단지 대학생이 되기 전 단계에 불과하지 않은 것처럼 과정은 결과에 복속되지 않는다. 과정은 과정 자체로 의미를 가지며, 그 자체로 유의미한 영향을 미친다.
공예는 기본적으로 과정의 행위다. 테이블 상판에 다리를 붙이려면 못을 박아야 하고, 못을 박으려면 못과 망치를 준비해야 하고, 못과 망치를 준비하려면 공구함을 가져와야 하고, 공구함을 가져오려면 공구함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야 한다. 어느 한 과정이라도 누락된다면 결과 자체가 불가능하다.
필자는 시민들 모두가 공예품을 쓰고, 공예라는 행위를 영위하는 사회를 꿈꾼다. 지난 천 년의 변화보다 최근 십 년간의 변화가 더 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무언가 속도를 제어하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가치들을 쥘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하다.
사회학자와 예술이 공예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마도 그 대안이 공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예’를 향유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김윤관 김윤관목가구공방 대표 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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