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읽어본다, SF] 흑사병으로 유럽이 사라졌다면… 中이 신대륙 발견하고 인도서 산업혁명 ‘상상 세계사’

입력
2019.03.01 04:40
수정
2019.03.01 08:43
19면
0 0

※ 과학소설(SF)을 문학으로, 과학으로, 때로 사회로 읽고 소개합니다. 지식큐레이터 강양구씨가 격주로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2> 킴 스탠리 로빈슨 ‘쌀과 소금의 시대’

흑사병으로 피폐해진 유럽 대신 중국이 세계 패권국으로 등극한다. 중국 주도로 재편된 가상의 세계지도. 열림원 제공
흑사병으로 피폐해진 유럽 대신 중국이 세계 패권국으로 등극한다. 중국 주도로 재편된 가상의 세계지도. 열림원 제공

한 순간에 서양이 역사에서 사라진다면 세상이 어떻게 변할까. 실제로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일이 있을 뻔했다. 14세기 이른바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유럽 인구 대부분이 흑사병의 희생자가 되었더라면 우리는 말 그대로 ‘서양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킴 스탠리 로빈슨의 ‘쌀과 소금의 시대’는 바로 이렇게 흑사병으로 서양이 사라진 세계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의 삶을 기록한 대체 역사 소설이다. 서양이 없으니 그 이후 700년의 세계사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근대 이후 세계사를 주도했던 유럽이 사라지고 나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이들은 누굴까.

상상력이 기막히다. 원주민이 살던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여놓는 악역은 유럽 대신 중국이 맡는다. 신대륙의 이름도 ‘아메리카’가 아니라 ‘잉저우(瀛州)’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러 보냈던 신선이 산다는 동쪽 바다 전설 속 땅 이름을 부친 것이다. 그럼, ‘정화의 원정’ 이후 1430년대 초부터 해양을 포기한 중국은 어떻게 태평양을 건넜을까.

명나라 만력제(1572~1620)는 임진왜란 때 애를 먹인 일본을 징벌하고자 함대를 보낸다. 일본을 향하던 함대는 그만 태평양을 서에서 동으로 시계 방향으로 도는 북태평양 해류에 갇히고 만다. 속수무책 해류를 따라가던 그들이 결국 도착한 곳은 샌프란시스코. 소설 속에서 ‘팡장(方丈)’으로 불리는 이곳은 구대륙과 신대륙이 만나는 첫 지점이 된다.

근대 과학 혁명은 이슬람 세계의 몫이다. 17세기 ‘중앙아시아의 로마’로 불리던 사마르칸트에서 연금술이 만개한다. 동서 문명이 교류하던 이곳에 살던 연금술사는 최초로 진공 상태를 만들고(보일 대신),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관찰하고(갈릴레이 대신), 결국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다(뉴턴 대신). 이곳의 과학혁명은 인도로 계승돼 산업혁명으로 이어진다.

중국 북서부 간쑤성 란저우에서 사회주의, 여성주의 이념이 최초로 등장한 것도 인상적이다. 문명의 접경 지역에 살면서 문명 간의 공존을 직접 실천해온 (존 스튜어트 밀과 해리엇 테일러 커플을 떠올리게 하는) 모슬렘-중국인 부부가 내놓은 사회주의와 여성주의는 소설 속에서 인류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이상으로 자리매김한다.

서양 없이 전개될 700년간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세 캐릭터도 흥미롭다. 이들은 각각 B, I, K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지고 환생을 거듭하며 감동의 드라마를 만들어 낸다. 그들이 왕과 신하, 연인 혹은 부부, 장인과 사위, 이모와 조카, 전우, 혁명 동지 등 온갖 관계로 맺어지며 씨줄과 날줄로 엮는 700년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문학 작품이다.

쌀과 소금의 시대

킴 스탠리 로빈슨 지음 박종윤 옮김

열림원 발행•703쪽•1만4,500원

킴 스탠리 로빈슨은 현존하는 “가장 탁월한 SF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작가다. ‘붉은 화성(Red Mars)’(1992년), ‘녹색 화성(Green Mars)’(1993년), ‘푸른 화성(Blue Mars)’ (1996년)의 ‘화성 3부작’은 1990년대의 대표 SF 작품으로 꼽힌다. 2026년 12월 21일, 화성을 식민지로 만들고자 떠난 100명의 인간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을 추적한 대서사시다.

최근에 펴낸 ‘뉴욕 2140(New York 2140)’(2017년)은 어떤가. 이 소설은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메트로폴리스 뉴욕을 무대로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가 인류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지를 보여준다(뉴욕이 베네치아가 되었다!). 그의 소설은 SF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그의 소설이 많이 읽힐수록 세상이 좀 더 나아지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국내에서는 킴 스탠리 로빈슨의 작품을 접하기가 어렵다. 2007년에 나왔던 ‘쌀과 소금의 시대’는 도서관에서만 구할 수 있고, ‘화성 3부작’의 첫 번째 이야기 ‘붉은 화성’도 2016년에 앞부분이 번역되고 나서 감감무소식이다. 눈 밝은 출판사가 나서서 로빈슨의 소설을 펴낸다면 기꺼이 독자 펀딩에 나설 의향이 있다.

SF 초심자 권유 지수 : ★★★★ (별 다섯 개 만점)

강양구 지식큐레이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