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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다산에 순순히 잡힌 이존창… 주문모 신부 보호하려 서로 ‘체포’ 묵계

입력
2019.02.28 04:40
수정
2019.03.07 11:14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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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내포의 사도 이존창 검거기

이존창 생가 터인 여사울성지. 충청남도 제공
이존창 생가 터인 여사울성지. 충청남도 제공

성주산의 일

다산은 금정찰방 시절에 쓴 일기 ‘금정일록’에서 천주교라는 말을 몹시 아꼈다. 천주교도 검거 사실도 드러내서 적지 않았다. 1795년 8월 17일 김복성 문초 이후 한 달이 지난 9월 19일 일기에 “성주산(聖住山)의 일로 순영(巡營)에 보고하였다”는 내용이 한 줄 나온다. 천주교 관련 내용은 이런 식으로 늘 얼버무렸다. 닷새 뒤인 24일에 다산의 앞선 보고에 대해 관찰사 유강이 답장을 보내왔다.

“죄인을 붙잡아 오는 일을 날마다 몹시 기다리고 있습니다. 날짜를 헤아려 보니 오늘이면 너무 늦는군요. 이제껏 자취가 없는 것으로 보아 혹 낌새를 알아 미리 피한 듯합니다. 깊은 산골 궁벽한 골짜기는 몸을 감추기가 몹시 쉬워 이처럼 늦어지는 것인가요? 몹시 의아하고 답답합니다. 잡아온 뒤의 일은 마땅히 그대에게 들어보고 서로 상의해 처리할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성주산의 일은 이미 비밀 공문을 발송하였습니다.”

성주산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성주산은 앞서 다산이 금정으로 내려올 때 수원유수 조심태가 홍산과 성주산, 청양의 언저리 깊은 산 속에 천주교도들이 몰래 모여 숨어산다고 하니 잘 살피라고 했던 그곳 중 하나다.

금정역 인근의 천주교도들을 붙잡아 취조해서 자백을 받은 뒤, 이를 통해 얻은 정보로 다산은 바로 성주산 쪽의 천주교도 검거에 나섰고, 9월 19일에 중간보고를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닷새 뒤 관찰사는 다산이 죄인을 붙잡아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태 소식이 없어 답답하다는 뜻을 적었다. 다산은 앞의 보고에서 자신이 성주산의 천주교도들을 붙잡아 올 경우 이들의 신병 처리에 대해 모종의 부탁을 했던 듯하다. 알았으니 염려 말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존창의 생가가 있던 충남 예산군 여사울성지에 서있는 이존창 사적비. 비석 뒤편으로 남프랑스풍으로 지어진 여사울성지 성당이 보인다. 정민 교수 제공
이존창의 생가가 있던 충남 예산군 여사울성지에 서있는 이존창 사적비. 비석 뒤편으로 남프랑스풍으로 지어진 여사울성지 성당이 보인다. 정민 교수 제공

이존창은 누구인가

다산이 보고한 성주산의 일이란 바로 충청도 지역의 천주교 지도자였던 이존창(李存昌, 1759~1801)의 검거와 관련된 일이었다. 이존창이 누구인가 그는 권철신, 권일신, 이기양 등과 사제 관계로 이어져 교회 창립기부터 천주교에 입교해, 가성직 제도 당시 10인의 신부로 활동했던 교계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내포 지역에서 교회의 확장에 전념하다가, 진산사건이 일어난 1791년 11월에 충청도관찰사 박종악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배교를 선언하고 바른 길로 돌아오겠다는 서약을 쓰고 석방되었다. 하지만 이는 교회 유지를 위한 형식적인 배교에 불과했다. 1791년 12월 30일에 이존창은 홍산(鴻山)으로 이주하였다.

이존창과 주문모 신부의 겹치는 동선도 추적이 필요하다. 1794년 연말에 입국해서 1795년 1월 4일에 한양에 도착했던 주문모 신부는 그해 부활절까지 조선말을 배우고 성사를 주면서 바쁘게 지냈다. 1795년 4월에 이존창은 계동 최인길의 집으로 찾아가 주문모 신부를 만나, 함께 지방 교회 순회에 나섰다. 먼저 양근 윤유일의 집에 들렀고, 이후 고산의 이존창과 전주의 유관검의 집을 거쳐 상경했다. 주신부의 지방 순회는 이존창과 유관검이 보호와 안내를 맡았다.

당시 주문모 신부는 이존창에게 “권한도 없이 성사를 집행하였으니 어떻게 그 보석을 다할 수 있겠는가. 순교만이 그대에게 용서를 구해줄 걸세”라고 말했다. 이로부터 이존창은 마음으로 순교를 준비했다. 다블뤼 주교가 쓴 친필 비망록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상경 직후 한영익의 고발로 6월 28일에 최인길과 윤유일, 지황이 죽자, 주신부는 극적으로 창동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충청도 연산(連山) 땅 이보현(李步玄)의 집에 숨어 두 달 남짓 머물렀다. 그는 근 1년 뒤인 1796년 5월에야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이후 2년간은 창동과 정동의 몇몇 지도급 천주교인의 집을 며칠씩 돌아가며 묵었다. 이는 1801년 3월 15일 주문모 신부가 더 이상의 희생을 피하려고 자수하여 의금부에 끌려가 심문 받았을 당시의 공초 기록에 자세하다.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 나온다.

금정역이 있던 충남 청양군의 다락골 줄무덤 성지. 무명순교자들의 시신을 매장한 묘지다. 당시 이 지역이 얼마나 천주교 신앙이 뜨거웠는지 보여 준다. 정민 교수 제공
금정역이 있던 충남 청양군의 다락골 줄무덤 성지. 무명순교자들의 시신을 매장한 묘지다. 당시 이 지역이 얼마나 천주교 신앙이 뜨거웠는지 보여 준다. 정민 교수 제공

다산, 이존창을 직접 체포하다

다산이 이존창 체포 비밀 보고서를 올렸던 그때, 주문모 신부는 금정역과는 그다지 멀리 않은 충청도 연산 이보현의 집에 은신해 있었다. 이존창은 이때 홍산을 떠나 보령 성주산 인근에 숨어있었던 듯하다. 다산은 이존창의 소재에 대한 정보를 김복성을 통해 들었고, 이후 한 달간 자수를 권유하는 이면 접촉이 이루어졌다. 한 달 뒤 이존창의 검거를 직접 진두지휘한 것도 다산이었다. 그 내막은 1795년 겨울에 서울로 복귀한 뒤 새로 충청도관찰사로 내려가게 된 이정운(李鼎運)에게 보낸 다산의 편지 ‘오사께 답함(答五沙)’에 보인다.

“저 이존창이란 자는 목숨을 구해 달아난 한낱 백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령 이 자가 바람과 비를 부르고 둔갑술에 은신술을 써서 오위영(五衛營)의 병졸을 풀어도 능히 잡을 수 없는 자인데 제가 꾀를 내고 계책을 편 덕택에 하루아침에 체포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스스로 공으로 삼기에는 부족합니다. 하물며 그는 이름을 바꾸고 자취를 숨겨 이웃 고을에 거처를 피한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미 그가 있는 곳을 알아서 장교 한 사람과 병졸 하나를 데리고 가서 묶어 온 것이니, 이는 마치 동이 속에서 자라를 잡은 격입니다.”

다산은 검거를 피해 성주산에서 변성명하고 은신해있던 이존창을 장교 한 사람과 병졸 하나를 대동해가서 포승줄로 묶어서 왔다. 그의 은신처를 정확히 알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검거였다.

그런데 다블뤼 주교는 자신의 비망기에서 당시 충청감사가 관장에게 이존창의 체포를 명하자, 관장이 이존창의 은신처를 알아내려고 그의 부모를 체포하여 고문하므로 이존창이 어쩔 수 없이 직접 출두했다고 조금 다르게 적고 있다. 관장이라면 당시 이존창이 살고 있던 홍산의 현감이었을테고, 홍산 현감에 의해 그의 부모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자, 성주산에 숨어있던 이존창이 다산을 통해서 자수했던 사정이 된다.

다산이 이존창을 체포한 당사자임은 1795년 12월 24일, 정조가 중희당(重熙堂)에서 이정운과 만나 나눈 ‘일성록(日省錄)’의 대화에도 나온다. 정조는 이날 충청도관찰사로 떠나는 이정운을 따로 불러 말했다. “충청도에 사학이 근래 들어 자못 극성스럽다. 듣자니 정약용이 견책을 받아 보임된 뜻을 잘 알아, 사학의 우두머리를 감영의 옥에 가두었다고 알려왔다. 경이 감영에 도착한 뒤에 엄하게 조사하여 매섭게 징계함이 좋겠다.” 정조는 정약용이 이존창을 붙잡아 와서 감영의 옥에 가두었다는 충청도관찰사의 비밀보고를 받았던 것이다.

모종의 묵계, 또는 거래

필자는 이 대목에서 당시 내포 지역의 천주교회 조직과 다산 사이에 모종의 묵계가 있었을 가능성을 의심한다. 김복성에 이은 이존창의 체포는 주문모 신부를 놓친 이후 불어 닥친 검거 선풍에서 천주교회의 조직을 살리고 인근에 피신 중이던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한 고육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산과 김복성, 이존창 사이에는 모종의 언약이 있었고, 그 약속은 앞서 관찰사 유강이 다산에게 보낸 편지에서, 잡아온 뒤의 일은 그대와 상의한 뒤에 처결하겠다고 한 언급에서 저간의 사정을 짐작케 된다. 아무 약조 없이 김복성이 지도자 이존창의 은신처를 다산에게 덥석 알려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설령 알려준다 해도 이존창이 달아날 마음이 있었다면 다산을 얼마든지 따돌릴 수 있었다. 김복성의 문초와 이존창의 검거 사이에는 한 달 이상의 간극이 있었다. 중재와 설득에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다는 뜻이다.

다산과 이존창은 1785년 명례방 추조적발 이전부터 익히 알던 사이였다. 두 사람은 초기 교단의 가성직 신부 10인에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권일신의 갑작스런 사망과 이승훈의 배교 이후 이존창의 천주교계에서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런 그가 다산의 손에 순순히 잡혀 감영에 갇혔다. 1791년 박종악이 그랬던 것처럼 배교의 서약만 하면 석방해 주겠다는 이면의 약속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본다.

다산은 포교과 포졸 한 사람씩 단 두 사람만 데리고 성주산의 은신처로 이존창을 찾아가 아무 저항 없이 그를 묶어 감영으로 호송시켰다. 수행인원이 단 둘 뿐이었다는 것은 저편에서도 다산이 올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미 모든 조율이 끝난 상태에서 다산은 이존창과 만났던 셈이다.

겉으로 공개적인 배교 상태에 있었고, 천주교도 검거의 특명을 띠고 금정찰방으로 내려온 다산을 이존창이 체포의 위험을 감수하고 만났던 것은 다산이 주문모 신부의 피신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존창의 검거는 말이 체포이지 부모를 체포해 고문하는 상황에서 실제로는 자수에 가까웠다. 하지만 다산에게 천주교회 책임자급을 검거하게 하여 힘을 실어줌으로써, 관심을 주문모 신부에서 딴 데로 돌리려는 천주교회 내부의 필요성이 맞아떨어진 일종의 거래가 아니었을까 한다.

또 다른 한 축

‘벽위편’에는 조정에서 주문모의 비밀 체포를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적은 내용이 있다. 뒤에 포도대장까지 오른 이해우(李海愚)가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거의 잡을 뻔 하다가 놓친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주문모 신부는 여자들이 타는 가마를 타거나, 혹 상복을 입고서 포위망을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갔다. 마주쳐 지나며 놓친 적도 몇 차례였다. 1801년 신유사옥 당시 사건 담당자가 이해우를 찾아가 묻자, 이해우는 주신부의 추적 과정을 적은 ‘염문기(廉問記)’ 한 묶음을 내주었을 정도였다.

천주교도 검거에 공을 세워 천주교 관련 혐의를 벗으라는 정조의 당부를 다산은 이렇게 실천에 옮겼다. 한편 다산이 금정찰방으로 있는 동안 처리해야 할 일 중 다른 한 축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것은 이 지역의 성호학통으로 공서파의 입장에 서있던 남인들과 관계를 개선하여, 이를 통해 서학을 버리고 정통 유학으로 완전히 전향했다는 보증을 받아오는 일이었다. 천주교도 검거뿐 아니라, 남인 내부에서의 세탁도 정조와 채제공이 요구했던 명령 속에 들어 있었다. 다산은 이존창의 검거를 마무리 하자 이 문제로 눈길을 돌렸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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