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사는 69세 조모씨는 이달 중순 병원비로 570여만원을 냈다. 큰 돈이지만 조씨는 면역항암제를 투여 받기 위해 지불했다. 지난해 10월 폐암 말기 진단을 받은 이후 이만한 돈을 그는 5번째 썼다. 대출을 받았고, 유산으로 물려받은 작은 땅마저 팔았다. 조씨에게 면역항암제는 ‘희망’과 같은 말이다.
올해로 95세인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15년 12월 뇌에 발병한 흑색종이 완치됐다고 밝혔다. 흑색종 때문에 “내 운명은 신의 손에 달렸다”고 했던 그는 면역항암제 치료 후 거짓말처럼 회복했다. 조씨를 비롯한 많은 암 환자들에게 ‘나도 나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안겼다.
2013년 미국 과학학술지 ‘사이언스’는 면역항암제를 ‘가장 주목할 연구 분야’ 중 하나로 꼽았다. 인체가 갖고 있는 면역 능력을 강화시켜 스스로 병을 이기게 돕는 면역항암제는 기존 암 치료 방식을 뒤집는 약이다. 암세포를 직접 공격하는 화학항암제, 암 관련 유전자나 단백질을 타깃으로 하는 표적항암제와 작용 과정이 전혀 다르다.
우리나라는 선진국 못지않게 면역항암제를 빨리 받아들였다. 다국적제약사들이 제품을 출시한 직후인 2014년부터 국내 시판허가가 시작됐다. 획기적인 신약으로 치료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은 면역항암제의 원리를 발견한 미국과 일본 과학자들이 지난해 10월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으면서 정점에 다다랐다.
면역항암제는 바이오업계의 시계도 빨리 돌려 놓았다. 2001년 출시된 첫 표적항암제 ‘글리벡’은 2년 뒤인 2003년에야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허가를 받았고 제약업계의 노벨상이라고 알려진 갈렌상을 수상한 건 출시 후 8년 뒤인 2009년이었다. 반면 카터 전 대통령이 투여 받은 면역항암제 ‘키트루다’는 2014년 출시된 그 해에 바로 FDA 허가를 받았다. 실제 노벨상을 받는데까지 걸린 기간도 출시 후 4년에 불과했다.
면역항암제의 노벨상 수상이 화제가 된 지 불과 3개월여 지난 올 1월말 암 환자와 보호자들로 이뤄진 한 온라인 커뮤니티 측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그들은 면역항암제가 희망이 아닌 ‘희망고문’의 대명사가 됐다고 호소했다. 화학항암제나 표적항암제 치료가 더 이상 소용 없거나 부작용을 견디기 힘든 환우들이 정작 면역항암제 혜택을 보지 못한 채 지쳐가고 있다는 것이다. 면역항암제에 건강보험이 너무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탓이다.
면역항암제 등장으로 가장 큰 변화가 기대된 분야는 치료가 어렵고 사망률이 높은 폐암이다. 현재 폐암 말기(진행성 비소세포폐암) 환자들은 면역항암제를 2차 치료에 쓸 때만 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다. 1차 치료로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뒤에야 면역항암제 투여가 가능하다. 1차 치료부터 쓰고 싶으면 조씨처럼 약값을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돈을 많이 내고 일찌감치 쓰든, 돈을 적게 내고 효과가 떨어질 때쯤 쓰든 환자가 결정해야 하는 구조다.
보건당국은 건강보험 재정 안정화를 위해 비싼 신약에 보험을 폭넓게 적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보건의료빅데이터개방시스템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보험재정에서 지출하는 약제비 중 항암제가 차지하는 비율은 7%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다. 보건당국이 면역항암제 보험 확대를 머뭇거리는 사이 면역항암제가 치료할 수 있는 병은 속속 늘고 있다. 기술의 발전을 정책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보험이 적용된 항암제 약값 중 5%로 정해져 있는 환자의 본인 부담금을 탄력적으로 조정해서라도 좀더 많은 환자가 면역항암제를 쓸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암은 여전히 사회에 빈곤층을 늘리는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그 배경에는 비싼 약값과 인색한 보험이 있다. 노벨상은 인류와 사회에 크게 기여했거나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는 업적에 주어진다. 면역항암제의 혜택이 더 많은 환자들에게 돌아가지 못하면 노벨상의 의미마저 퇴색된다.
임소형 산업부 차장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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