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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단순한 삶을 추구하세요? 무작정 버리지 말고 정리부터 해보세요”

입력
2019.02.27 04:40
수정
2019.02.27 11:26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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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라이프 시작은 소유의 인정

줄이기만 집착하면 되레 걱정만 늘어

단순한 삶을 주제로 곳곳을 돌며 강의하는 이는 실제 일상을 얼마나 단출하게 꾸려갈까. 지난 23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일보. 책 ‘가장 단순한 것의 힘’을 쓴 저자 탁진현(39)씨는 메고 온 가방에서 파우치 하나를 꺼내 보여줬다. 안엔 펜과 립스틱, 아이 섀도가 각 1개씩 들어 있었다.

탁씨는 립스틱을 딱 1개만 쓴다고 했다. 여성들이 보통 여러 색의 립스틱을 소유하고 있는 걸 고려하면 ‘화장품 빈민’으로 사는 셈이다. 남을 위해 억지로 꾸미지 말자는 ‘탈코르셋 운동’을 실천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화장에 아예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탁씨는 “메이크업 전문가에 상담을 받고 내 피부 색에 가장 맞는 색을 추천 받아 하나씩만 산 것”이라며 웃었다. 화장품에서 엿볼 수 있듯 탁씨가 추구하는 미니멀 라이프는 소유의 인정에서 시작된다. 다 거부하고 버리는 게 아닌 ‘정리’로 단순한 삶을 추구한다. 탁씨는 “정리는 삶에서 내게 진짜 소중한 것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책 ‘가장 단순한 것의 힘’을 쓴 탁진현 씨의 거실. 부모님과 협의해 가구를 비웠다.
책 ‘가장 단순한 것의 힘’을 쓴 탁진현 씨의 거실. 부모님과 협의해 가구를 비웠다.

◇ ‘여행 가방 하나의 삶’이 바뀐 이유

정리의 가치를 깨닫기까지 탁씨도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는 처음엔 “극단적 버리기”에 집중했다. 주변 물건을 세로 1m 남짓의 여행용 가방 하나에 넣을 수 있는 것만 남기고 다 버렸다. 200여 벌이 넘었던 옷도 25벌로 싹 줄였다. 2014년 퇴사를 한 직후였다.

탁씨는 회사 일로 스트레스를 받아 2012년부터 물건 줄이기를 시작했다. 비우기로 마음의 안정을 찾은 뒤 더 줄이기에 매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난관에 부딪혔다. 줄이는 데 집착이 생긴 탓이다. 탁씨는 “‘이젠 뭐를 줄일까’ 생각만 하게 되더라”며 “버리기에서 정리로 화두를 바꾸고 정리의 기준을 새로 정했다”고 말했다.

필수품만 고집하던 탁씨는 ‘내게 행복을 주는 물건’을 소유 목록에 추가했다. 25벌에 불과했던 그의 사계절 옷은 요즘 35벌로 늘었다. 등산에 빠진 그가 등산용 옷과 장비를 자신을 설레게 하는 물건으로 분류해 쌓아둔 결과다. 탁씨는 “이젠 공기청정기가 생존품이 됐다”며 “여행용 가방 하나에서 경차 한 대를 넘지 않는 선에서 소유의 마지노선을 새로 정했다”고 말하며 웃었다.

탁 씨 방에 있는 책장이다. ‘정리의 달인’은 강아지 인형을 버리지 않는다. 생필품은 아니지만 보고 있으면 행복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탁 씨 방에 있는 책장이다. ‘정리의 달인’은 강아지 인형을 버리지 않는다. 생필품은 아니지만 보고 있으면 행복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 사회와 단절 ㆍ무소유에서 정리로

필요 없는 물건과 ‘나쁜’ 음식 그리고 휴대폰에 저장된 연락처 줄이기로 삶의 단순화를 꾀했던 미니멀 라이프 운동은 새 국면을 맞았다. 변화의 중심축은 사회와의 단절과 소유를 줄이는 데 천착해 인생의 본질을 찾으려 했던 ‘외형적 다운사이징’에서 ‘마음 정리’로 옮겨가는 추세다.

스콧ㆍ헬런 니어링 부부처럼 자연에서 자급자족하며 단순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미국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1년에 6주만 일하며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기도 버겁기는 마찬가지다. 극강의 미니멀 라이프는 ‘요요 현상’에 빠질 위험이 높다. 밖이 아닌 안을 살피며 지속 가능한 단순한 삶을 찾기 위한 몸부림, 바로 ‘정리 열풍’이 부는 이유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엔 요즘 ‘(일본 유명 정리 상담가인) 곤도 마리에가 나에게 미친 영향’(pianist*****)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jun*****) 등의 글과 주변을 정리한 인증 사진들이 쏟아진다. 넷플릭스가 새해 리얼리티 프로그램 ‘곤도 마리에: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를 공개한 뒤 ‘소비 천국’ 미국에서 분 정리 바람이 국내까지 이어졌다. 버릴 것은 버리고 핵심만 취한다는 패션 유행 ‘놈코어(Normcore)’ 현상과 맥을 같이 하는 흐름이다.

책 '가장 단순한 것의 힘'을 쓴 탁진현 작가.
책 '가장 단순한 것의 힘'을 쓴 탁진현 작가.

◇ ’소유=미덕’ 부모 세대의 변화

정리를 통한 삶의 단순화 바람은 일터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행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김현길 작가(36)는 정리하는 삶을 일터에서 먼저 시작했다. 작업 도구 단순화를 통해서였다.

화가는 물통이나 이젤을 쓰지 않는다. 에코백에 피그먼트 라이너(드로잉펜)와 워터 브러시(물붓) 정도만 챙겨 떠난다. 그림 그리는 시간도 한 시간을 넘기지 않으려 한다고. 김 작가는 “색과 시간을 겹겹이 쌓아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그림보다 30분 정도 주어진 시간에 간편한 도구로 현장에서 느낀 솔직한 감정을 그림에 담고 싶어 택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소유 다이어트’에서 시작된 미니멀 라이프는 가족 문화에도 변화를 낳고 있다. 김은혜(35)씨의 부모님은 ‘자발적 정리족’이 됐다. 김씨의 집 거실엔 TV와 쇼파가 없다. 김씨가 함께 사는 부모님의 동의를 얻어 거실을 비운 것이다.

김씨는 “직장 생활을 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몸이 아파 화학조미료 버리기부터 시작해 집안 물건 비우기와 정리를 시작했다”며 “옛 물건 움켜쥐고 버리기 싫어했던 부모님과 적잖이 싸웠고 싸움이 커져 내 물건만 정리하기로 했는데, 그 변화를 보고 부모님도 마음을 열었다”고 말했다. 결핍의 시대를 살며 소유를 미덕으로 여긴 부모들이 관계보다 나, 단순함을 추구하는 밀레니엄 세대(1980~2000년대 초반 출생) 자녀들과 살며 새로운 삶의 풍경을 만들어 내는 셈이다.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은 “그간 한국을 지배했던 소유를 둘러싼 가치관이 윤리에서 이젠 실용으로 중심축이 변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는 사례”라고 분석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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