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고재학 칼럼] “언론을 믿지 말라”는 경고

알림

[고재학 칼럼] “언론을 믿지 말라”는 경고

입력
2019.02.25 18:00
수정
2019.02.25 18:06
30면
0 0

진짜ㆍ가짜 뉴스가 헷갈리는 시대

정치적 의도 깔린 통계 왜곡 만연

공론장의 자정 기능으론 한계 뚜렷

신문 칼럼을 훑다 보면 울렁증이 도지는 기분이다. 정치 칼럼은 아예 읽기가 싫다. 증오와 적대감을 부추기는 글이 많아서다. 제목만 봐도 무슨 얘기 하는지 훤히 알 수 있다. 객관성이 생명인 경제 칼럼조차 정치적 의도를 갖고 통계를 왜곡하는 글이 넘쳐난다. ‘쇼크’ ‘최악’ ‘대란’ 같은 섬뜩한 단어가 가득하니 한국 경제는 파탄 일보 직전이다.

최근 많은 언론이 지니계수를 들어 “부의 양극화와 경제적 불평등이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나라가 됐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가짜 뉴스’라고 공격했다. 한 신문은 가짜 뉴스의 근거로 OECD 30개 회원국 중 우리보다 지니계수가 더 나쁜 나라가 17개국이나 된다고 했다(통계청 2015년). 우리 소득 불평등 수준이 OECD 중간 이상은 되는데 문 대통령이 “세계에서 가장 극심하다”고 잘못된 사실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국민 상식과 동떨어진 주장이다. 한국 임금노동자 상ㆍ하위 10% 격차는 OECD 회원국 중 2위다. 비근로소득까지 포함하면 상위 10% 계층이 전체 소득의 43.3%를 점한다. 소득 불평등도가 선진국 중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자산 격차는 더 심하다. 하위 50% 계층의 자산 비중은 전체의 1%대에 불과하다. 외환위기 이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가 커지고 이자ㆍ배당ㆍ임대 등 비근로소득의 불평등이 확대된 영향이다.

지니계수가 소득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표이긴 하나, 가구소득 기준이라 정확한 측정에 한계가 있다. 예컨대 노인 가구는 소득이 적어 고령화 국가일수록 지니계수가 나쁘다. 연봉 1억원에 전세 사는 40대와 연소득 5,000만원인 100억원대 노인 자산가를 비교해 보자. 소득으론 40대의 생활수준이 더 높지만 자산 규모를 보면 노인이 훨씬 부자다. 가난한 가구가 고소득층에 비해 저임금 노동에 뛰어드는 가족 구성원이 많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더욱이 문 대통령은 ‘소득 불평등’이 아닌 ‘경제적 불평등’을 얘기했다.

경제 통계가 현실을 왜곡하는 경우는 흔하다. 성장률만 해도 전년 동기 대비, 전분기 대비, 전분기 대비 연율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세 가지 각기 성장률을 과소ㆍ과대 평가하거나 기저효과(Base effect) 탓에 빠른 상승세를 타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 금융위기 직후인 2008년 루비니 뉴욕대 교수가 “한국의 4분기 성장률이 마이너스 20%”라고 밝혀 우리를 놀라게 한 게 대표적이다. 한국 기준으론 전분기 대비 5%대 역성장했지만, 연율로 환산하면 마이너스 20%를 넘는다.

통계의 함정에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는 게 언론의 역할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경제적 불평등의 경우 임금 및 자산 격차, 비근로소득의 쏠림 정도, 인구구조 등과 그 추세를 종합적으로 살펴야 정확한 해석이 가능하다. 한 해 지니계수만 놓고 불평등이 심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건 정치적 의도가 엿보이는 억지이자 궤변이다. 입맛에 맞는 통계만 골라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니, 언론이 아닌 흉기 소리를 듣는 것이다.

2004년 미국에서 흥미로운 실험이 있었다. 진보ㆍ보수주의자 그룹을 모아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WMD)를 테러조직에 넘겨줄 위험이 있다”는 부시 대통령의 주장을 담은 뉴스를 보여 줬다. 그리고 “WMD가 거짓이었다”는 이라크 사찰단의 객관적인 보고서를 읽게 했다. 진보주의자들은 부시 대통령의 주장에서 더 멀어진 반면, 부시를 옹호하던 보수주의자들은 더 강경하게 이라크의 WMD 보유 주장을 믿었다(‘루머’, 캐스 선스타인).

공론장에서 진실이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는 보장돼야 하고 가짜 뉴스는 자정 기능을 통해 걸러지는 게 옳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자기 이익과 신념에 맞는다는 이유로 가짜 뉴스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게 현실이다. 여기에 주류 언론까지 영합하면서 “저널리즘은 죽었다” “언론을 믿지 말라”는 외침이 커지고 있다. 주류 미디어 멸종시대가 곧 닥칠지 모른다. 그 이후 세상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고재학 논설위원 겸 지방자치연구소장 goindol@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