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형 어미와 단정적 표현이 주를 이룬 박두진 시는 ‘남성적 어조’이고, 높임말 위주인 김소월의 시는 ‘여성적 어조’라네요.”
고등학생 조모(16)양은 참고서로 문학 작품을 공부할 때마다 불편함을 느낀다. 힘찬 어조로 강한 의지를 드러낸 작품은 남성적이고, 애절한 정서를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은 여성적이라는 설명 때문이다. 학교 시험에서도 참고서를 그대로 베낀 문항이 빈번히 출제된다. 주로 ‘이 시의 어조가 남성적인가, 여성적인가’를 묻는다. 답안지엔 외운 대로 적지만 ‘당당하고 능동적인 태도가 남성의 전유물인가’에 대한 의구심은 해소되지 않는다.
교육 현장에서 성적 고정관념에 갇힌 교육 방식이 여전히 답습되고 있다. 문학적 표현 방식을 성별로 구분하는 국어 교과 참고서들이 대표적인데, 대부분의 참고서에는 ‘여성적, 남성적 어조’란 표현이 여전하다. 윤나영(17)양은 “차별적 표현인줄 알지만 참고서에 나오는 내용을 ‘정답’인양 달달 외워대니 문제의식도 절로 무뎌지는 것 같다”고 답답해했다.
비판과 지적이 없지는 않았다. 지난해 6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국어 교과 속 여성적, 남성적 단위를 삭제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와 1만7,000여 명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청원자는 “구시대적인 성 관념을 현대교육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교과서 출판사들은 이런 여론을 감안해 대부분 수정을 하는 추세다. 지학사의 경우 다음달 발간할 국어 교과서에서 ‘여성적 어조’라는 표현을 ‘여성 화자를 내세운 설정’ 등으로 부분 수정을 했다.
교과서는 바뀌어도 학생들이 교과서보다 의존한다는 참고서나 문제집은 해당 표현을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게 문제다. 매년 교육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검ㆍ인정을 받아야 출판되는 교과서와 달리 참고서와 문제집은 별도 규제를 받지 않는다.
정작 출판사들은 ‘참고서를 교과서처럼 매년 개정할 수는 없다’며 난색을 표한다. “앞으로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도, 이미 낸 참고서들까지 전면 수정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한 출판사는 “2015 개정 교육과정에 ‘성별에 따른 다양한 화법 이해하기’나 ‘남녀간 의사소통 방식 차이’ 등의 내용이 명시돼 문제될 것이 없다”는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답답한 교육 현실을 타개하겠다며 팔을 걷고 나서는 학생들까지 등장했다. 올해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진모(16)양은 지난해 국어교사가 수업 중 ‘여성적 어조’란 표현을 쓰자 동급생들과 함께 “요즘 시대에 ‘여성성’과 ‘남성성’을 구분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교사는 “미처 몰랐다”며 해당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학생들이 직접 참고서 사진을 찍어 올리며 ‘여성적 어조 같은 표현을 그만 쓰자’고 호소하는 글이 흔하다.
전문가들은 현장의 목소리를 교육 현실에 반영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릉 명륜고 국어 교사 최승범(35)씨는 “학생들의 불편하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남성적 어조는 힘찬 어조로, 여성적 어조는 섬세한 어조로 바꿔 가르친다”면서 “학생들의 의식을 교재 집필진들이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참고서 고객이 학생인 만큼 출판사들도 안이한 태도에서 탈피해야 하고 학교는 이를 적극 유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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