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드라마는 시청자의 공감대와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 분위기와 현실에 민감하다. 요즘 법과 정의를 주제로 한 드라마가 봄 개편과 함께 다시 안방을 찾았다. 정의롭지 않고 답답한 사회현실을 반영한 것일까?
법은 수렵과 농경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익충돌을 피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이익의 형태가 비교적 단순하던 시절, 법은 종교의 계율 및 윤리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다. 법이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말도 이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법의 역할은 훨씬 크고 복잡하다. 사람들은 파이가 커지면 서로 다투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파이가 커진 지금, 그 투쟁은 오히려 더 격렬해지고 있다. 옳고 그름을 가리고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법은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것일까? 몇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법은 누가 만드는 것일까? 국회의원이라고 한다면 순진한 것이다. 정확한 답은 법을 통해서 이익을 얻고 싶은 사람들이다. 현행 법률은 약 1400여 개에 달하며, 각각이 조직에 권한을 부여하고 예산을 투입한다. 그래서 법에는 좋은 법, 나쁜 법 그리고 이상한 법도 있다. 보편적 다수의 이익이라면 공익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익의 제도적 사유화가 시작된다. 하지만 학창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법에 대한 시민의 모습을 수동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로펌과 각 이익단체 등에서 올라온 법률안들이 의원실의 책상 위에 놓이고 있을 것이다. 정치는 개인의 이상과 국가의 현실 사이에서 그 간극을 메우는 일이며, 법은 그 정치의 결과로 내용을 채워간다. 따라서 올바른 정치가 없는 한 올바른 법도 있을 수 없다.
법은 제대로 집행되고 있는가? 법의 첫 번째 해석은 행정에서 시작한다. 법은 복잡한 현실에 추상화된 조문을 적용할 수 있도록 일정한 재량을 부여한다. 그런데 그 재량을 과소하게 행사하면 소극행정 또는 복지부동이 되는 것이며, 과도하게 행사하면 남용이 된다. 한편, 네트워크로 강하게 연결돼 있는 우리 사회에서 행정관행은 신속하게 공유되며, 한 곳에서의 부정의는 모든 곳에서의 부정의의 단초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공무원들이 법의 취지를 잘 구현할 수 있도록 관리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정권을 넘어 계속되는 복지부동은 지금도 여전하다.
사법작용은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검찰에 대해서는 정치검찰의 오명과 함께 검찰 내부의 폐쇄적 패밀리 문화와 민주적 통제의 미흡이라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현 정부 초기 다짐했던 스스로의 내부개혁에 대한 의지도 어느덧 자취를 감추었다. 더불어 비대해진 검찰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공수처 설치와 검경수사권 조정도 지지부진하다.
법원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임에도 믿을만한 정의의 보루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사법농단을 계기로 드러난 사법부의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사법부는 성을 쌓았고, 그 안에서 스스로 국민이 부여한 그 이상의 더 큰 권력이 되었다. 사법부 독립이라는 헌법적 가치는 사법권력의 방패로 오용됐다. 논의되고 있는 법원 개혁안 역시 자세히 뜯어보면 결과적으로 과거에 비해 크게 달라졌다고 보기 어렵다.
국민들이 재판부에 존경심을 표하는 이유는 판사들의 총명함에 대한 것이 아니라 법정의 권위에 대한 경의이다. 로마법에 따르면 권위는 타인에게 자발적 순응을 유도하지만, 권위주의는 의사에 반한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국민이 갖는 사법부에 대한 느낌은 권위주의에 가깝다. 법원의 권위가 무너지니 재판결과에 대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치적 목적의 불복과 부정을 조장하는 것이다.
2019년 대한민국, 법은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 여러 논평이 있겠지만, 지금 국민들의 눈높이에는 맞지 않으며,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최승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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