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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온 동해 해녀 할망들 ‘수고했수다, 오늘도!’

입력
2019.02.22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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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영 경북교통방송 피디, 내 인생의 히트곡은 ‘수고했어, 오늘도’

라디오 다큐 ‘TBN의 시선! 동백의 이름으로, 출가해녀 이야기’의 내레이션을 맡았던 ‘포항 명예시민’ 최백호 선생과 함께 포즈를 취한 김채영 피디.
라디오 다큐 ‘TBN의 시선! 동백의 이름으로, 출가해녀 이야기’의 내레이션을 맡았던 ‘포항 명예시민’ 최백호 선생과 함께 포즈를 취한 김채영 피디.

해녀들은 연장자를 ‘형’, ‘삼촌’이라고 부른다. 거친 바다와 씨름하느라 마음의 근육이 남자들만큼이나 단단해진 때문인지도 모른다. 머리에 어지럼 주머니가 하나씩 달릴 정도로 힘든 물질이지만, 아무도 바다를 원망하지 않는다. 해녀에게 바다는 가족들을 먹여 살린 보물창고이자 자부심이고, 상처 난 삶을 온전히 품어준 어머니다. 헤밍웨이가 그려낸 쿠바의 어느 나이든 어부처럼 ‘만약 바다가 사납고 악한 행동을 한다면 그건 바다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을까.

지난해 라디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동해안 해녀들을 만났다. 구룡포에서 출발한 취재 여정은 제주도까지 이어졌다. 동해안에서 물질하는 해녀들 중 많은 이들이 제주 출신이었다. 제주 해녀들이 원래 비옥한 바다를 찾아 1년 중 2~3달은 으레 뭍으로 물질을 떠났었다지만, 그들은 아예 삶의 터전을 옮겨버렸다. 제주 4.3 사건, 그 피가 낭자한 난리를 피해서 도망치듯 뭍으로 나온 이들이었다.

현덕선 ‘할망’도 그런 해녀 중의 하나였다. 4.3 사건 때 뭍으로 도망친 뒤, 포항 인근에 살면서 6.25와 경제 발전기까지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었다. 할망은 두꺼운 담요처럼 축 늘어진 가슴 밑에 꽁꽁 쟁여뒀던 이야기를 힘겹게 끄집어냈다. 좀체 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속 시원히 털어놓은 후 ‘해녀 형’답게 쿨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가씨는 운이 좋은 기라. 이런 이야기 아무한테도 안 했다. 혹시나 자식들한테 해가 갈까봐. 그일(4.3 사건)하고 조금이라도 상관이 있다고 하면 공직에도 못 나갔거든.”

할망은 눈치 안 보고 옛날이야기를 하는 시절이 오길 얼마나 기다렸을까? 산보다 높은 바람과 원망을 파도처럼 끈질긴 습관으로 눌렀을 것이다. 바다 밑으로 내려가 전복이며 해삼을 손에 잡을 때까지 숨을 짓누르면서 마음 속의 말들도 함께 꽉꽉 눌러대지 않았을까. 어느새 동백처럼 붉은 이야기가 바다처럼 시퍼렇게 삭혀질 때까지. 바다의 깊이만큼이나, 나로선 가늠하기 힘든 세월이었다.

다큐멘터리를 끝내면서 이 쿨하고 덤덤한 할망들의 일상에 어울리는 노래를 선물하고 싶어졌다.

옥상달빛의 ‘수고했어, 오늘도’.

소녀 같은 순박한 목소리를 골랐다. 그 수많은 삶과 죽음을 삼키고도 무덤덤하게 드러누워서 바람에 뱃살을 일렁이는 의뭉스런 바다처럼, 세상 모르는 듯 낭랑한 목소리로 할망들을 위로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평생 씩씩하게 살아온 당신들에게 눈물을 찍어내게 만드는 노래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축 처지는 노래로 어깨에 힘을 빼기엔 우리 할망들이 바다와 씨름하며 살아내야 할 창창한 노년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김채영 경북교통방송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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