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중위소득과 주당 노동시간 등을 고려해 34세 미만 청년 5,000명에게 지급해오던 청년수당을, 기본 소득 개념으로 ‘조건 없이’ 확대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는 소식이 20일 전해졌다. 곧장 “수급자들이 생계나 건전한 자기계발을 위한 것이 아닌 술을 마시거나 유흥을 즐기는 데 돈을 낭비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지난해 청년수당 사업을 담당한 서울시의 청년활동지원센터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는 “치킨 먹어도 되나요”였다. 카드 결제가 가능한 대부분의 곳에서 써도 된다고 담당자가 답하자 어느 청년은 이렇게 다시 물었다. “프라이드가 아니라 (더 비싼) 양념치킨을 먹어도 될까요.”
청년의 낙담은 최저시급(8,350원)이나 청년실업률(8.9%) 같은 수치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낙담은 일상적인 선택의 순간에 더 자주 발생한다. 조금 더 싼 것, 조금 더 저렴한 곳, 조금 더 평범한 조건을 선택할 때, 예컨대 양념통닭보다 1,000원 더 싼 프라이드를 시키는 찰나에 찾아온다.
김세희의 첫 소설집 ‘가만한 나날’에는 그런 찰나의 순간과 작은 선택 앞에서 망설이는 청년들이 등장한다. 보증금과 월세를 나눠 내며 동거 중인 연인 원희와 상률은 더 이상 원룸에서 살 수 없다 판단하고 방이 두 개인 집을 구하러 나선다. 그러나 신혼부부가 아닌 그들은 최신형 가전을 구비할 수 없다. 찌그러지고 얼룩 진, 누구의 손을 타다 온지 알 수 없는 중고 가전제품을 사야만 한다. “다 거지 같아”라고 토로하는 원희에게 상률은 “포기할 건 포기해야지. 어떻게 네가 원하는 대로만 다 하면서 살아”라고 되받는다. 하지만 원희는 생각한다 “난 대단한 걸 꿈꾼 게 아닌데. 대단한 것들은 언감생심 꿈꿔 본 적도 없는데. 내가 바란 건, 아주 작은 것이야. 그게 그렇게 허황된 바람인가?”
가만한 나날
김세희 지음
민음사 발행ㆍ328쪽ㆍ1만 2,000원
작가는 2015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소설집에는 등단작 ‘얕은 잠’과 지난해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을 받은 표제작 ‘가만한 나날’을 비롯해 ‘드림팀’ ‘감정 연습’ ‘말과 키스’ 등 단편 8편이 실려있다. 20대 중후반부터 30대 초반에 걸쳐 있는 소설 속 인물의 나이는 작가가 지난 4년 동안 소설을 쓰며 통과한 연령(29~32세)과 오롯이 겹친다. 소설 속 사건 역시 그 나이대 청년들이 대개 겪게 되는 독립, 연애, 취업, 직장생활을 다룬다. 삶의 일련의 단계 속에서 청년들은 과거와 작별하며 새롭게 맞닥뜨린 인생의 과업 앞에서 떨림과 기대, 불안함과 아득함을 함께 느낀다.
작가는 청년을 설명하기 위해 그들의 연애를 주된 사건으로 가져온다. 8편 중 4편에 연인이 등장한다. 그러나 ‘가만한 나날’ 속 연인들은 앳된 설렘 한가운데 있는 연인이 아니다. ‘결혼’이라는 다음 단계 앞에서 지속가능성을 저울질 할 수밖에 없는 연인이다. 그 지속가능성을 판단할 때 중요한 덕목은 서로에 대한 설렘이 아닌 부양해야 할 부모거나, 안정적인 직장이거나, 저금리 대출이거나, 모아놓은 돈이다. 그래서 그들은 “둘이 결혼할 거지”라는 주변의 질문에 즉답하지 못한다. “어디를 둘러봐도 젊음과 시작으로 가득했고 자신만만했던 때”를 지나쳐 “다가오는 것들이 두려워지는” 시기 앞에서 망설인다.
연인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해야 하는 시기, 동시에 이들은 ‘직장동료’라는 낯설고 모호한 질문도 함께 받아 든다. 어느 날 갑자기 하루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 직장상사의 도저히 따를 수 없는 행동도, 나를 상처 입히는 말도 이해해보려 갖은 애를 쓰다가 끝내 실패하기도 한다. 경쟁구도에 놓이게 된 인턴 동료를 보고 미워하지 않겠다고 다짐해놓고도 바로 “그가 실수하기를 바라며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다가 결국에는 실제로 그를 미워하게까지 되는 자신과 마주치기도 한다.
소설집의 제목 ‘가만한 나날’의 ‘가만하다’는 수식이 어쩌면 이 20대부터 30대에 이르는 청년 세대를 설명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가도, 책을 덮을 때면 오히려 그 수식이 고마워진다. ‘88만원 세대’나 ‘3포 세대’같은 극적인 단어로만 설명되지 않는, 은은하고도 고요한, 그러면서도 핍진한 일상이 청년에게 있다는 것을 소설은 알아주는 듯하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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