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세종대에 확인된 한일 격차를 좁히지 못하다가 임진ㆍ정유 전쟁을 겪고 이후 우호기에 격차 확대를 방치하다 20세기 초 망국이라는 대 실격의 역사를 쓴다. (10)에서 살펴본 격차의 축소ㆍ해소 과정이 지난 60여년에 집중된 것과 달리 여기선 훨씬 앞서 이슈별로 격차 축소에 기여했거나 기여할 수 있었던 조선의 일곱 선비(혹은 집단)를 조명한다. 이들은 간언과 저작을 통한 제안과 경고, 정책의 시행이나 행동에 나섰다.

리더층의 세계관에선 임진전쟁 발발 초기의 항왜로서 실전에 참여해 전공을 세운 김충선을 등용한 전시 조정의 선비들이다. 침략의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 휘하 장수인 그는 사야가로 알려져 있으며, 수백명의 부하와 함께 귀순하여 조총과 화약 제조 기술, 조총부대 전술의 전수 등 조선군의 전투력 강화에 크게 기여한다. 국난기에 적국 장수를 우리측 전력으로 활용한 포용성있는 리더십의 한 사례다.

신분제 타파에선 평소 서얼 차별에 반대하는 주장을 내놓다가 광해군대 지배층에 의해 영창대군 옹립의 역적으로 몰린 허균이다. 그는 ‘하늘이 사람을 낼 때는 귀한 집 자식이라 해서 풍부하게 주고 천한 집 자식이라 해서 인색하게 주지 않는다’는 말로 유명한 유재론(遺才論)의 저자다. ‘신분 차별은 천리 거역’이라는 천부인권론을 내세우는 등 1789년 프랑스혁명의 주역들보다 170여 년 앞서 유사한 사상을 펼치고, 이를 최초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에서 구체화한다. 사문난적으로 몰린 배경엔 요절한 형 허봉의 벗인 얼자 출신 이달과의 교분이 있다.

개혁의 구상과 추진에선 인조와 효종 대에 대동법 시행과 상평통보 주조 분야에서 활약한 개혁가 김육이다. 그는 공물 부담의 불공평과 불합리를 백성의 눈높이에서 인식하여 대동법의 전국 시행에 강한 열성을 보인다. 쓰러져 가는 양반가 출신인 그는 광해군대에 10년 가깝게 은둔하다가 서인 집권 후 관직에 돌아 와 공법의 문제점을 개선한 대동법의 시행과 확산에 일생을 건다. 1658년 9월 5일자 효종실록은 ‘양호(兩湖)의 대동법은 그가 건의한 것’으로 적고 있다.

농업생산성 증대에선 세종의 첫번째 통신사로 일본에서 보고 들은 문물을 토대로 배우고 고쳐야 점을 정리하여 조정에 올린 박서생이다. 그는 1428년 일본에 파견된 후 1년 만에 돌아오는데 현지 체재 중의 관찰과 탐문을 토대로 수차와 동전의 보급, 상거래 질서 확립 등을 중심으로 한 경제 활성화와 농업생산성 제고 방안을 건의한다. 이를 받은 조정은 수차의 시험적 보급을 빼고 모두 거부한다. 집현전 대제학으로 정사였던 그는 일본 체재시 확인한 양국 격차 중 수용가능 사안 중심으로 조정에 추격 방안을 제시했다.

상공인 우대에선 중종대인 1523년 윤 4월 기관 차원에서 공인 우대책을 조정에 건의한 홍문관 선비들이다. 집현전의 맥을 잇는 곳이 기관의 이름으로 상공인 박대 정책의 철폐를 요구한다. 이때 홍문관은 ‘공인들을 불러... 재화와 서비스를 풍족히 한다’는 중용 20장에 수록된 구경(九經)의 가르침을 인용하는데 수용되지 않는다. 경제력과 군사력 강화의 기회를 놓친 댓가는 70년 후 임진ㆍ정유전쟁이라는 대 재앙이었다.

민생 개선에선 1년 넘게 체미하다 귀국시 철도모형을 가지고 와 표준궤간 채택을 관철시킨 이하영이다. 고종의 통역으로 있다 박정양ㆍ이완용ㆍ이상재와 함께 신설 재미 공사관에 파견되는데 그만이 강한 호기심으로 철도 정보를 모은다. 귀국 후 요로에 힘써 1896년 3월 미국인 모스에의 경인선 부설권 허가, 1896년 7월 제정된 국내철도규칙 3조의 표준궤 규정을 얻어낸다. 덕분에 1898년 9월 경부선 허가시 표준궤가 채택되어 늦게 깔린 조선 철도가 먼저 깔린 일본의 협궤 철도를 넘어서면서 일순 우리 철도사의 품격이 높아진다.

분권과 공익 추구에선 정유전쟁시 포로로 체일할 때와 귀국 후 조정에 일본의 실상을 알려 대비를 촉구한 강항이다. 1656년 간행된 간양록의 적중견문록에서 일본의 정치ㆍ국토지리ㆍ사회의 정보와 실상을, 또 예승정원계사에서 명인 대우 등 공익형 실리 추구를 중시하는 분권제 사회의 특징을 소개한다. 하지만 거주자만이 알 수 있는 알짜배기 정보가 담겨진 그의 글에 주목한 왕과 권신은 없었다. 강항은 이이의 평생지기인 성혼의 문인이므로 이이의 영향을 직ㆍ간접적으로 받았을 터이다. 이이는 1582년 9월 1일자 소에서 감사 임기를 1년 이상으로 늘려 지방관의 업무효율을 높이고 지방행정 조직을 통합해 자리만 차지하는 수령의 수를 줄이자는 등 지방행정 개편에 의욕적인 소수의 선각자였다.

아쉽게도 허균, 박서생, 홍문관, 강항ㆍ이이의 제안과 경고는 때를 넘겨 먼 훗날에야 수용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조선 말기의 혼란과 망국 사태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끝으로 우리측 선비와 (9)에서 다룬 일본측 무사 들의 활약이 양국 역사의 품격에 미친 영향의 비교 고찰은 주제의 특성상 독자 몫으로 남겨둔다.

배준호 한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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