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26>협동조합 달고나 만든 김정훈
자영업을 하면? 돈이 남거나, 사람이 남거나, 둘 다 잃거나, 둘 다 얻거나. 넷 중 하나 일 거다. 통계는 둘 다 잃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귀띔한다. 우리나라 경제활동 인구 4분의 1이 자영업자라는데, 그마저도 70%가 연 매출 1억원이 안 되는 영세업자라는 수치를 보면 말이다.
이런 냉혹한 현실에서 돈도 벌고 사람도 얻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일을 벌인 사람이 있다. 사장의 지위를 버리고 협동조합이란 공동체의 일원을 자처한 김정훈(48) ‘협동조합 달고나’ 이사장이다.
그는 16년여 전만 해도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누비던 영상기자이자, 프로듀서였다. 2000년대 초 6㎜ 캠코더의 출시로 시작된 ‘1인 미디어 시대’의 중심에 그가 있었다. 2001년 출입기자실의 폐쇄적인 운영을 고발한 ‘인천공항 출입금지기자실 사태’, 사상 최초의 국민참여경선이자 ‘노무현 신화’의 서막인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전국 순회 경선이 대표적이다. 지금이야 널리 알려졌지만, 당시는 중심의 언론이 크게 관심 갖지 않은 현장들이었다. 의원 시절의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 직후 첫 인터뷰 풀 버전 영상 테이프는 아직도 그의 서고에 있다.
현장의 열기를 느끼며 살던 그는 2008년 3월 훌쩍 떠났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탈리아로. 온라인에 송출하는 몇 분짜리 영상은 아무래도 ‘내 것’이 아니었다. 진짜 내 작품으로 내 삶을 살아보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가보자는 생각이 그를 이끌었다. “일을 할 때도 주말이면 친구들과 모여 맛있는 음식을 해먹고, 어울려 술을 마시곤 했어요. 그렇다면 이 즐겨하는 요리를 하며 살 수 있는 식당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이탈리아를 택한 건 막연한 이유에서였지만, 탁월한 결정이었다. “그 유명한 영국의 셰프 제이미 올리버도 이탈리아로 요리 여행을 갔다는데, 이 나라는 그럼 정말 ‘맛의 성지’인가 보다 생각했죠.”
그런데 그는 요리학원이 아닌 생의 터전을 교습소로 삼았다. 이탈리아에서 배울 것은 요리 기술이 아닌 삶과 문화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함께 간 강수연(달고나 조합원)의 표현을 빌리면, ‘이탈리아의 기운을 쐬고 오자’는 거였죠.”
1년 1개월 뒤,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왔다. 여기저기서 빌릴 수 있는 대로 돈을 끌어모아 4,000만원 남짓의 소자본으로 서울 상수역 인근에 ‘비스트로(요리와 와인을 파는 작은 식당) 달고나’를 열었다. 10년 전 상수동은 지금의 상수동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운도 따라 식당은 잘됐다. 돈이 벌리기 시작할 무렵, 그러나 그는 돈의 확장이 아닌 쉼의 연장을 선택했다. 2년 차에 시작한 주5일 영업은 지금까지 달고나가 고수하는 원칙이다. 그가 손으로 삐뚤삐뚤 적어 붙인 ‘노동시간을 줄여야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 건설이 가능하다’는 카를 마르크스의 주장을 인용한 장기 휴가 공지문은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단골들은 달고나를 ‘개념식당’이라고 부른다.
그저 현상 유지만 하고자 했으면 더 큰돈을 벌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3년 전 달고나를 협동조합으로 바꿨다. 쉽게 말하면 공동경영의 형태다. 파격적인 시도다. 그래서 위기도 겪었다. 그래도 살아남았다. 바닥을 쳤지만, 그래도 이것이 지속 가능한 길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그에게 달고나는 개인 사업장이 아닌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망원동 복지마트 자리로 터를 옮긴 달고나의 휴무일에 그를 만났다. 자영업 10년에 인테리어 공사 정도는 ‘뚝딱’이라는 그가, 페인트 자국이 멋스럽게 묻은 후드 티셔츠를 입고 앞에 와 앉았다.
◇잘 벌릴 때 영업일 줄여 쉬는 날 늘였다
-매주 월, 화는 쉰다고요. 주 5일제는 언제부터 시작한 건가요?
“상수동 시절부터요. 식당을 막 시작했던 2009년엔 뭣 모르던 때니까 처음엔 주 6일 영업을 했어요. 그런데 하루 쉬는 건 쉬는 게 아니더라고요. 워낙 일이 힘드니까 문 닫는 날은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진짜 쉬어야 했죠. 여가가 아니었어요. 이러다 ‘일 기계’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개업 2년 차 무렵부터 주 5일 영업을 하기 시작했죠.”
-주 5일을 해도 수익이 나던가요?
“주 6일을 하면 월급을 10만, 20만원 더 가져갈 수 있다는 계산은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그 대가로 한 달에 고작 4일을 쉬면서 일을 하는 건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또 다행히 단골 손님들이 우리의 그런 태도를 지지해줬죠. ‘이 식당은 지켜줘야 해’ 같은. 그런 손님들의 애정 덕분에, 주 5일을 하면 수치상으로는 매출이 떨어져야 하는데 실제론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죠.”
-원래 직업은 PD였죠?
“2000년에 영상에 관심 있는 친구 3명과 ‘미동(美動)’이라는 프로덕션을 차렸죠. 처음에는 독립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만들 생각이었어요. 물론 민간기업이나 관공서의 홍보영상 제작 같은 생계형 사업도 하면서요. 그러다가 대안매체로 급속히 뜨기 시작한 ‘오마이뉴스’와 손을 잡고 영상취재를 하기 시작했어요. 일종의 외주업체였죠. 격동의 시기였으니까, 그 덕분에 흥미진진한 현장에 많이 다녔죠.”
-온라인 미디어가 태동하던 때였으니까요.
“맞아요. 마침 90년대 후반 일본의 소니사에서 내놓은 6㎜ 카메라 덕분에 지상파 방송사의 ENG 카메라가 없어도 누구나 고화질의 영상 작업을 할 수 있게 됐죠. 돌이켜보면, 지금 ‘유튜브 시대’에 버금가는 미디어 혁명이 일던 시기네요. 오마이뉴스가 주목 받게 된 현장에 미동도 있었죠. 대부분 기성 언론이 찾지 않는 현장이었어요.”
-애초 맘 먹었던 길은 아니지만, 나름의 보람이 있었겠네요.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가 기록할 수 있었으니까요. 또 공중파 방송에서 보여주지 못하는 방식으로 보도할 수 있었고, 반응도 댓글로 바로 오니까 짜릿했죠. 요즘 말하는 ‘인생샷’도 건졌네요. 전직 북파공작원(HID)들이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 현장이었죠. 가스통에 불을 붙여가면서 과격하게 시위를 했어요. 그때 카메라를 들고 불길 아래서 시위대와 경찰특공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사진기자가 찍은 거였어요. 하하. 그랬던 시절이죠.”
그는 아직도 그 시절 찍은 영상 테이프 1,500여 개를 보관하고 있다. 저작권도 그에게 있다. “앞으로 살면서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그 자료들로 뭔가를 만들어 내는 일이에요. 개인적으로도 인생의 30대에 가장 빛났던 시기의 작업물이지만, 사회적인 가치도 있는 자료니까요.”
-그런데 왜 그만 뒀어요?
“한편으로 회의감이 들었죠.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그래야 하는데, 그 길로부터 너무 멀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방황의 시기를 보내다, 그는 2008년 인생의 변곡점을 찍었다.
“(미동 멤버였던) 강수연과 ‘뭔가 우리 다른 삶을 선택해보자’고 했죠. 주말이면 우리는 늘 살던 오피스텔에 친구들 불러서 요리를 해서 먹고, 마시고, 얘기하고 어울리는 걸 좋아했거든요. 식당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한 거죠.”
◇PD 일 접고 가진 돈 털어 이탈리아로
-그래서 이탈리아로 떠난 거군요. 왜 이탈리아였어요?
“철저하게 계산하고 간 건 아니에요. 식당을 하려고 맘 먹고 책도 찾아보고 주위 식당도 보니 이탈리아 요릿집이 많더라고요. 유명한 셰프들도 이탈리아를 많이 가기도 하고. 그래서 ‘아, 이탈리아가 맛의 성지’구나 싶었죠. 그런데 실제 이탈리아에서 산 건 13개월 중 후반 7개월 정도예요.”
-그 전에는요?
“이탈리아와 가까운 지중해의 섬 몰타에서 살았어요. 영어를 먼저 배우려고요. 몰타가 한 때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영어를 쓰거든요. 이탈리아와 가깝다는 장점도 있었고요. 영어 배우기에는 여러모로 가성비가 좋은 나라였죠. 영어는 마스터하지 못했지만, 수영은 내가 물에 빠져 죽지는 않을 정도의 수준이 됐죠. (웃음)”
-이탈리아 생활은 어땠어요.
“몰타에서 사귄 이탈리아 친구가 있었어요. 몰타의 영어 프로그램이 끝난 뒤 자연스럽게 그 친구가 사는 베로나로 가게 됐죠. 베로나에서 3개월, 페루자에서 3개월, 볼로냐에서 1개월 살았어요.”
-뭘 하면서요?
“주로 여행을 했죠. 또 현지에서 알게 된 친구들과 함께 장을 보고 실제 이탈리아 가정에서는 어떤 요리를 해먹는지 옆에서 보고 함께 만들어 먹으면서요. TV 요리 프로그램 보면서 따라 하기도 하고. 그렇게 살다 보면 나한테 녹아드는 게 있거든요. 이탈리아의 유명 요리학교를 다녀볼까도 생각했는데, 애초 우리의 계획대로 가기로 했죠. 예를 들어서, 한식을 배우고 싶은 외국인이 있다고 쳐요. 유명 요리연구가의 정석 레시피대로 배우는 것도 의미 있겠지만, 가정집이나 남대문시장에서 더 한국적인 맛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도 그런 걸 기대한 거죠. 실제 이탈리아 사람들이 집에서 해먹는 걸 요리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으니까요.”
그가 달고나에서 내놓는 메뉴 중 하나인 ‘폴렌타’도 밀라노 인근의 도시에 사는 친구네 집에 갔다가 배운 요리다. 옥수수 가루와 치즈, 버터 등을 넣어 죽처럼 끓여 만든다.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탈리아 가정에서는 중요한 음식이거든요. 눌어붙지 않도록 1, 2시간을 계속 저으며 만들죠. 그런데 친구 집에 갔더니 가스렌지 옆에 폴렌타를 저어주는 간이 기계까지 장착해놓고 해먹더라고요. 이게 그 정도로 대단한 음식이구나 싶었죠. 파스타도 이탈리아인들은 ‘어머니의 음식’, ‘영혼의 음식’으로 여기죠. 넉넉지 않던 시절 어머니들이 밀가루로 반죽해 면을 만들어서 팬에 가득 요리해 퍽퍽 퍼주던 음식이거든요. 이탈리아에 살면서 음식에 담긴 의미나 역사, 문화를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요.”
-식당에서 요리를 배우지는 않았나요?
“실제 주방을 취재한 적이 있죠. 이탈리아에 갈 때 카메라를 들고 갔거든요. 촬영을 해두면 귀국해서 다큐멘터리 같은 프로그램으로 제작해서 팔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결과적으로는 못했지만. 아무튼 이탈리아에 있을 때는 그럴 생각으로 볼로냐에서 일하는 한국인 셰프 최경준(나중에 그는 달고나 초기 멤버로 합류한다)씨를 취재했죠. 마르코 파디가라는 볼로냐에서 유명한 미슐랭 스타 셰프가 ‘이제 미슐랭식이 아닌 내 방식의 요리를 하겠다’면서 연 비스트로에서 파스타를 담당하고 있었죠. 그때 가정집의 부엌이 아닌 실제 레스토랑의 최전선인 주방을 경험했어요. 한 달간 거의 매일 최경준씨의 주방과 일상을 기록했죠.”
-그때 느낀 건 뭔가요.
“주방이 그간 미디어를 통해서 간접 경험했던 에너지 넘치는 환상의 장소는 아니라는 것, 굉장히 힘들지만 또 재미있기도 한 곳이라는 걸 알았죠. 요리 한 접시에 담긴 비즈니스 요소도 배웠고요.”
◇빈털터리로 시작한 상수동 식당
그는 애초 한국에서 가진 돈을 모두 모아 만든 3,000만원을 들고 떠났다. 돈 벌이를 따로 하지 않았으니, 귀국 시점은 주머니가 빌 때였다. 2009년 4월이 그 때였다.
-한국에 돌아와서는요?
“거지였죠. 하하. 정말 빈털터리였어요. 그러니 각자 본가로 들어가서 살면서 가게를 얻을 장소를 알아보고 다녔죠. 그러다 찾은 곳이 상수동의 옛 비스트로 달고나 자리예요. 그때는 철물점이었고, 2층은 특이하게 절이 들어선, 지금과는 다른 분위기의 동네였죠.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100만원, 거기다 그래도 역세권이라고 이른바 ‘바닥권리’(금) 2,000만원도 붙었죠. 당장 현금 3,000만원에 인테리어 비용까지 구해야 했어요. 그랬던 상수동이 9년 만인 작년에는 월세가 260만원까지 뛰었죠. 아무튼 여기저기서 당장 필요한 돈을 빌려서 마련하고, 인테리어도 아는 사람 수소문해서 비용을 줄여서 했죠. 그때 공사 과정을 지켜보고 배우고 한 게 큰 도움이 됐어요. 망원동의 지금 이곳으로 옮길 때는 인테리어를 전부 제가 다 했으니까요. 비용을 아끼려면 어쩔 수 없죠. (웃음)”
그렇게 2009년 11월 30일 달고나의 문을 열었다.
-실제 식당을 열고 난 뒤에는 시행착오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아, 정말 운이 좋게도 그때 마침 볼로냐의 최경준 셰프가 귀국을 했어요. 3개월 동안 이른바 ‘오픈 셰프’로 일을 해줬죠. 그 덕에 달고나가 연착륙했고 저도 트레이닝을 받았죠. 이미 볼로냐에서 부대끼며 지낸 시간이 있었으니 소통이 빨랐어요.”
-꽤 잘 됐지요?
“운이 좋았어요. 괜찮은 평가를 받았으니까. 그런데 금전적으로 잘 된 건 아니었어요. 원가 계산을 잘하지 못한 탓이죠. 하하. 한국 파스타 값이 너무 터무니 없다고 생각해서 가격을 1만원 이하부터 시작했거든요. 그랬더니 합리적인 가격의 이탈리안 식당이라고 소문은 났는데, 정작 우리는 밑지는 장사를 했죠.”
-언제부터 안정기에 접어들었나요?
“문 연 지 1년이 지나고부터요. 어느 날 보니 하루 매출이 80만원 정도 되더라고요. 굴곡이 있는 법이니까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그 수준이 유지가 되더라고요.”
-그런데 왜 협동조합 형태로 바꿀 생각을 했죠?
“한참 잘 될 때는 저와 강수연씨 그리고 정규직 직원 3명에 아르바이트생까지 전 직원이 7명이나 됐어요. 그런데 2014년 즈음부터 숨이 막힌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영업이 잘 돼도 우리는 불안한 기반에 서 있으니까요. 부동산이 내 것이 아니고, 월세는 상권의 쇠락에 상관 없이 오르기만 하는데 만약 손님이 예전처럼 찾지 않는다면? 그런 구조적인 한계를 체감한 거죠.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미래도 생각해야 했어요. 단순히 거쳐가는 곳이 아니라 달고나가 그들에게 앞날을 준비하는 버팀목이 되도록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야 인간적인 관계도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을 테니까요. ‘자본론’도 다시 읽어보고, 관련 서적도 찾아 보다가 협동조합이라는 방식이 대안이 될 수 있겠다 싶었죠.”
-어떻게 꾸렸나요?
“달고나에서 일하는 직원으로만 조합을 꾸리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시도를 관심 있게 바라보는 지인들도 참여했어요. 현재는 직원 조합원 8명에 비직원 조합원을 합쳐 23명이죠. 최소 출자금은 1,000만원(만 40세 이상 기준, 40세 미만은 500만원)으로 정했어요. 다만 이전에 비스트로 달고나에서 일했던 직원 조합원은 달고나의 성장에 기여한 노동의 가치를 500만원으로 인정해서 참여 기준에 차등을 뒀죠.”
◇망해보기도 했지만 다시 일어섰다
그렇게 2016년 달고나는 협동조합이 됐고, 망원동에 평양냉면을 주 메뉴로 하는 ‘협동식당 달고나’를 하나 더 열었다. 그러나 반년 만에 쓰라린 실패를 안겼고 문을 닫았다. 이후 상수동의 비스트로 달고나를 운영하다가 지난해 11월 지금의 망원동 달고나로 옮겼다. 옛 망원동 주택가 가운데에 있던 복지마트 자리다. 그 인지도를 살려 ‘복지마트 달고나’로 이름도 바꿨다. 이탈리아 요리를 하는 비스트로와 빵, 샌드위치와 수프 같은 사다 먹는 테이크 아웃 매장을 합쳤다.
-협동조합으로 바꾸니 장점이 뭔가요.
“음, 사실 지금은 없어요. 이달 말에 3차 총회를 하니까, 이제 3년이 됐거든요. 그럼에도 이것이 지속 가능한 방식이라는 믿음이 있어요. 사실 협동조합으로 바꾸고 나서 의사 결정 과정이 더뎌진 측면도 있어요. 내가 사장일 때는 직원에게 명령을 하면 끝이지만, 지금은 의견 차이를 좁히기 위해 제안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니까요. 반면, 책임감도 동등하게 갖죠. 이곳 망원동 매장은 주방이 세 개예요. 비스트로 주방, 빵 주방, 샌드위치와 수프 주방. 그리고 각각 주방을 맡는 조합원이 있죠. 홀 담당과 와인 담당도 있고요. 각자의 영역을 경영하는 개념이죠. 그러니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문제가 있으면 개선하고 일이 있으면 새벽에 나와서 업무를 시작하죠. 다달이 매출을 뽑으면 각자 영역의 성과가 나오고 원인은 자신이 제일 잘 아니까요.”
-일종의 주인의식인가요?
“맞아요. 일반적인 가게에서는 직원이 평생 다니고 싶다고 생각하기보다 어서 돈을 모아 내 가게를 차리자고 생각하기 마련이죠. 반면 달고나는 조합원들이 함께 이곳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 가는 구조죠.”
달고나의 조합원 중에는 자기 가게를 차렸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는 이들도 있다. 장사가 되지 않아 사업을 엎어본 자영업자가 한둘이겠나. 그런데 이들이 다시 일어서 또 다른 사업을 시작하기란 쉽지 않다. 경제적인 문제도 있지만 ‘또 망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탓이다. “그런데 달고나 협동조합은 출자금만 내면 되니까, 큰 모험을 무릅쓰고 자영업을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부담이 적죠.”
-냉면집 협동식당 달고나의 실패가 있었지만 여전히 협동조합 모델이 맞다고 여기나요?
“좌절하던 때도 있었죠. 그 일로 많은 손실을 봤고, 작년까지 수습하느라 힘들었어요. 그래도 협동조합의 형태였기 때문에 뒷감당 하기에는 더 수월했던 측면도 있죠. 다행히 이곳으로 옮기고 나서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고 있어요. 우리 조합원들이 그러죠. 바닥 쳤으니 이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고.”
◇돈보다 사람을 택한 식당
-달고나는 어떤 의미가 있는 공간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자영업에 뛰어들고 실패해서 나가잖아요. 사회적으로 보면 손실의 덩어리가 정말 크죠. 그럼에도 지금도 그 실패를 경험하는 사람도 있고요. 달고나가 그런 실패의 악순환을 벗어날 수 있는 모델이 되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본다면, 삶의 도가 뭔가요?
“내가 가진 능력이 얼마 되지 않지만, 이걸 주변 사람들과 함께 키우고 또 나누며 살고 싶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게 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이지만, 체질적으로 나는 그런 시스템과 맞지 않나 봐요. 저기 가게 앞에 놓인 트럭이 제 것이거든요. 앞집 철물점 사장님이 트럭을 쓸 일이 있어 빌려달라 했다고 쳐요. 그 분과 친한데 대여료를 흥정하는 게 불편한 거죠. 그냥 도와주면, 돈은 못 받을지 몰라도 사람을 얻는 거잖아요. 살면서 한 사람을 아는 게 더 큰 힘이 되니까요.”
‘달고나’는 그 달고나가 맞다. 지금도 초등학교 앞에 파는 곳이 있는지 모르겠다. 설탕에 소다를 섞어 불에 녹여 만든, 사탕도 캐러멜도 아닌 그 달짝지근한 맛. 그는 그 달고나가 어쩌면 자신의 첫 요리가 아닐까 생각해 지었다고 한다.
돈을 조금 덜 벌더라도 지속 가능한 가치를 택한 협동조합 달고나. 그 가치란 바로 사람이었다. 달고나가 사람이 있는 식당의 첫 맛으로 기록된다면, 그래서 이런 선한 도전의 순환이 시작된다면, 참 근사한 일 아닌가.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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