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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근 칼럼] 거짓말과 속임수에 관대한 사회

입력
2019.02.20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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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고 속이는 것에 관대했던 우리 역사

신뢰 낮고 사기 만연한 현실로 이어져

사회지도층부터 달라진 모습 보여줘야

“그대로네. 사람들은 별로 변한 게 없어.”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해봤다. 1653년 제주도에 표착해 13년간 억류됐다 극적으로 탈출한 네덜란드인 하멜이 환생한 후 이 땅을 다시 둘러본다면 이런 소회를 털어놓지 않을까. 자신이 만났던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후손이 일군 놀라운 발전과 성취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연신 찬탄을 쏟아낼 게다. 하지만 장구한 세월을 견뎌낸 악습의 질긴 생명력엔 씁쓸함을 감추기 어려울 듯싶다.

“조선인은 거짓말하고 속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을 지나치게 믿어선 안 된다. 그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고도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잘한 일로 여긴다. 또한 조선인은 매우 곧이 잘 듣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그들에게 어떤 것이든 믿게 할 수 있었다.”

거짓말과 속임수의 범람을 목도하며 ‘하멜 표류기’를 다시 들여다봤다. ‘하멜 표류기’는 거짓말과 속임수에 관대한 우리네 습속에 뿌리 깊은 역사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하멜의 눈에 비친 조선인은 속이는 데도 능하지만 속기도 잘하는 사람들이다. 지금 이 땅에서 삶을 영위하는 우리 모습과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장구한 시간이 경과했고 민도(民度)도 크게 높아졌는데 악습이 전혀 풍화되거나 쇠잔해지지 않은 게 신기할 따름이다.

대검찰청이 지난해 말 공표한 ‘2018 범죄분석’ 자료에 따르면 2017년 사기 범죄 발생 건수는 24만1642건이다. 사기는 전체 범죄(182만4876건)의 약 13.2%를 차지해 범죄 유형 중 1위를 기록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지난 10년 동안 전체 범죄 발생 건수는 20.3% 감소했지만 사기 범죄는 12.7%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가히 ‘사기공화국’이라 불릴 만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근현대 질곡의 역사 속에서 민초들은 간단없이 생존의 위협에 노출됐다. 생존의 방편으로 거짓말과 속임수에 기대는 일이 잦았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거짓말과 속임수에 관대한 풍토가 형성되었음 직하다. 압축 성장기에 이뤄진 광범하고 급속한 계층 상승과 소득 증가는 이런 풍토에 넉넉한 자양분을 공급했을 공산이 크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데이비드 데스테노는 저서 ‘신뢰의 법칙’에서 경제적 여력이 생기거나 권력이 강해지면 타인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가볍게 여길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설파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타인과 협력해야 할 필요성이 감소한다는 게 주된 논거였다.

압축 성장은 사람들의 물질적 욕망을 한껏 자극해 사기꾼이 일을 도모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했을 수도 있다. 사기 사건이 발생하려면 정보의 비대칭성이 존재해야 한다. 사기꾼은 자신이 상대방을 속인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피해자는 상대방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사기 사건이 빈발하는 건 피해자들의 머리가 나빠서가 아닐 게다. 물질적 욕망에 압도돼 이성적 판단에 실패하는 경우가 너무 흔한 건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기꾼이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는 현실도 사기 범죄를 부추기고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 교수는 범죄를 예상되는 수익과 죗값 간 비교 형량의 소산으로 규정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기꾼이 구속될 확률이 매우 낮고, 구속이 돼도 놀라울 정도로 가벼운 처벌을 받는 우리 사회에서 사기 범죄가 창궐하는 건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하겠다. 대법원 양형기준에 따르면 피해액 1억원 미만 일반사기에 대한 기본 형량은 징역 6월~1년6월에 불과하다.

개각이 임박한 모양이다. 인사청문회에서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관대했던 삶의 궤적을 가진 고위 공직 후보자는 그만 봤으면 좋겠다. 인사청문회가 갖는 교육적 효과가 심대하고 영속적이기 때문이다. 지도층 인사들의 거짓말과 이중성은 신뢰 사회로 나아가는 걸 가로막는 가장 큰 암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도층 인사들부터 도덕적으로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질긴 생명력을 지닌 악습의 청산을 기약할 수 있기에 하는 얘기다.

김경근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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