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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꽃을 든 남자와 우주 불고기

입력
2019.02.20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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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유럽의 거리 풍경에는 확실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바로 ‘꽃을 든 남자’다. 퇴근 무렵 유럽의 도시에는 꽃을 든 남자들이 많다. 자신감과 설레는 마음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낸 남자들이 꽃을 들고 어딘가로 간다. 여자 친구를 만나기로 한 레스토랑일 수도 있고 가족이 기다리는 가정일 수도 있다. 꽃을 든 남자들은 사랑받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말로 보기 힘든 장면이다. 한국에서는 2월 중순과 말경에야 꽃을 든 남자를 볼 수 있다. 장소는 주로 레스토랑. 이들은 꽃을 주기 위해 들고 있는 게 아니다.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학교를 졸업한 남자들이다. 나도 그 가운데 하나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식 날 나는 꽃다발을 들고 불고기집에 갔다. 추운 운동장에서 진행된 졸업식에 굳이 동생들이 따라온 거의 유일한 이유일 것이다. 가운데가 볼록하고 구멍이 송송 뚫린 양은 판 위에 육수에 잠긴 부드러운 고기와 야채를 얹었을 때 생기는 지글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풍기는 냄새는 대학에 떨어져 재수를 결정한 상태인 졸업자와 그 가족의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녹여버렸다. 불고기 맛과 향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

불고기는 초등학교 졸업식 날이 가장 맛있었다. 일단 장래에 대한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그 많은 식구가 불고기를 먹는 데에 대한 경제적인 걱정도 들지 않았다. 부유한 친척 어른이 와서 사주셨기 때문이다. 그 어른이 불고기 육수에 밥을 비벼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우리 어릴 땐 이런 불고기는 구경도 못 했어.”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분이 어릴 때는 서울식 육수 불고기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유가 간단하다. 고기가 넉넉하지 않았던 게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넉넉하지 않아도 잔치 때는 구경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테니까. 경제가 발전하면서 고기의 수요가 늘자 채소와 달콤한 양념 국물을 잔뜩 추가한 육수형 불고기를 생각해냈다. 육수형 불고기는 졸업식 식사로 제격이었다. 일단 양이 많고 얇게 저민 고기는 금방 익었다. 이게 진짜 이유다. 그 전에는 고기를 얇게 저미는 게 너무 어려웠다. 살짝 얼려야만 고기를 얇게 썰 수가 있다. 예전에는 삼겹살 구이도 없었다. 내가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먹은 것은 1980년대 초반의 일이다. 불고기와 삼겹살 요리 발전에 고기보다 중요한 게 냉장고였다.

불고기는 말 그대로 사냥한 고기를 숯불에서 직접 구워 가면서 먹는 고기 요리였을 것이다. 대략 150만 년 전부터 전 세계 모든 인류가 고기를 먹는 방식이었다. 그 당시 사람은 호모 에렉투스다. 당시에는 고기를 언제든지 구할 수 있었다. 다만 먹을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들이 사용하는 돌칼로는 고기를 써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1세대 불고기의 주재료는 코끼리였다. 코끼리는 구석기인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동물이다. 살코기와 지방은 영양을 충분히 공급해주고 뼈와 상아는 연장을 만드는 재료로 쓸 수 있었다. 40만 년 전 지중해 동부 연안에서 코끼리가 사라지자 호모 에렉투스도 사라졌다는 사실은 불을 처음 사용한 인류와 코끼리 사이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그 후에도 인간이 등장하는 곳이면 어김없이 코끼리가 사라졌다.

만약 호모 에렉투스와 네안데르탈인 그리고 구석기 시대의 호모 사피엔스가 고기를 얇게 저밀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면 그리고 야채와 육수를 곁들여 먹는 서울식 불고기를 일찌감치 알았다면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거대한 포유류들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점에는 이 순간 다같이 외쳐보자. 냉장고 만세!

올해는 인류가 달에 간 지 50년이 되는 해다. 우리나라도 달 탐사에 바짝 다가서고 있다. 2018년 말에는 독자 발사체 발사에 성공했다. 2020년에는 해외발사체를 이용해서 달 궤도선을 보내고 2030년에는 한국형 발사체를 이용해서 달착륙선을 보낼 예정이다. 그렇다면 2030년 달에 가는 한국 우주인들은 어떤 음식을 먹게 될까? 전 세계 어디를 가든 맛집을 찾는 한국 사람들이 설마 우주인에게 전투식량을 줄 리는 없다.

우리나라는 발사체와 달 탐사선보다 우주 식품을 먼저 개발했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2009년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이주운 박사팀은 김치ㆍ라면ㆍ수정과ㆍ불고기ㆍ비빔밥ㆍ미역국과 오디로 만든 참뽕 음료를 개발해서 러시아 국립과학센터(SSCRF)에 제출했다. SSCRF는 우주와 비슷한 공간에서 예행연습을 하는 우주인들에게 6종의 우주 식품을 120일 동안 섭취하게 하고 우주인의 영양상태와 면역력 변화를 체크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SSCRF 산하 의생물학연구소는 불고기ㆍ전주비빔밥ㆍ미역국ㆍ참뽕 음료를 우주식품으로 인증했다. 통조림으로 저장된 불고기는 우주에서도 맛과 식감이 유지된다. 비빔밥과 미역국은 뜨거운 물만 부으면 먹을 수 있다.

이젠 고기가 충분하다. 서울식 불고기 말고 언양식 불고기 우주통조림도 나와야 한다. 그리고 졸업식 시즌이 아니더라도 꽃을 든 남자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우리도 사랑받자.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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