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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심야식탁] 양파와 빵의 서약, 달콤한 눈물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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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심야식탁] 양파와 빵의 서약, 달콤한 눈물의 맛

입력
2019.02.19 14:50
수정
2019.02.19 15:2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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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에 양파를 달달 볶아 치즈와 빵을 얹어낸 양파수프. 게티이미지뱅크
버터에 양파를 달달 볶아 치즈와 빵을 얹어낸 양파수프. 게티이미지뱅크

양치기의 아들로 태어나 자연을 읊으며 시를 쓰던 스페인의 한 시인은 내란이 일어나자 투쟁 전선에 몸을 바치기로 한다. 전투와 도피와 체포와 투옥. 그 와중에 아내의 편지를 받는다. 빵과 양파밖에는 먹을 것이 없어요. 멀리 있는 그는 가족을 위해 해 줄 것이 없다. 그래서 어린 아들을 위해 시를 쓴다. 배고픈 요람 위에 누운 아이에게, 양파의 피를 빨며 잠들었어도 설탕의 피가 흐르기를 바라며. 맛있는 음식을 보내줄 수는 없지만 달빛과 종달새의 노래와 분홍방울새의 날개와 오렌지꽃 향기를 보내주마, 자장가를 부른다. 나는 내일 전쟁에 나갈 몸,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너는 네가 입에 물고 있는 엄마의 젖가슴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하기를.

시인과 아내는 일찍이 이런 말로 결혼서약을 했을 것이다. 비록 빵과 양파만 먹게 될 지라도 당신과 함께 하겠어요, 언제라도 너와 함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니까요. 말하자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하겠느냐는 그 고전적 질문에 대한, 배고파도 눈물 흘려도 산해진미가 없어도 함께하겠다는 결의에 찬 응답. 빵과 양파 그리고 당신(contigo, pan y cebolla). 사랑은 여전하지만 함께 있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슬픈 자장가를 부르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양파의 자장가를.

양파는 마늘이나 고추처럼 매운 족속 중의 하나다. 매운 것은 때로 위안과 활기를 불어넣어준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마늘과 양파는 노동자들을 위한 음식재료였다. 이집트의 건설노동자들에게 하루 지급할 마늘과 양파의 양을 지정한 기록이 발견된 바와 같이, 아주 오래된 자양강장제 혹은 진통제로 쓰였다. 매운 것들에게는 소독 항균의 능력까지 있으니 예방접종의 역할까지 일거양득. 양파와 마늘은 가난한 자들의 음식, 참고 견뎌내며 먹어야할 음식의 대명사였다.

그중에서도 양파는 매끈하고 둥근 외모와는 달리 유난히 까칠한 성격이라, 껍질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최루성 물질을 발사한다. 손 대기만 해봐, 매운 맛을 보여줄 테니. 그러고 보면 양파의 매운 맛은 먹는 자보다는 만드는 자에게 더 치명적이다. 주방의 막내에게 제일 먼저 주어지는 일은 양파 까기가 아닌가. 중국집이든 고기집이든 파스타집이든 기본 재료는 양파. 줄지 않는 눈물의 양파 까기. 다음은 콧물의 양파 다지기. 오늘따라 양파는 왜 이리 매운지. 언제쯤 양파에서 벗어나 불판 앞에 설 수 있을까요. 인생이란 양파 같은 것. 까도 까도 하염없는 고난의 양파, 중심에 다다라 남는 것은 공허한 인생.

그렇지만 양파는 사실 보기보다 다정하고 달콤한 친구다. 양파의 매운 맛은 다른 매운 것들에 비하면 좀 나긋한 성정을 가졌다. 날뛰고 짓누르고 장악하는 매운 맛이 아니라, 청량하게 어루만지는 산들바람 같은 매운 맛. 매운맛 뒤에 따라오는 단맛의 여운도 길다. 물에 담가 놓으면 그나마 가진 매운 기운도 살포시 내려놓을 줄 안다. 포용력도 좋아 다른 매운맛을 단맛으로 감싸 균형을 잡아주기도 한다. 양파의 속내를 가장 잘 아는 게 불이다. 불이 닿으면 한없이 달아지는 게 양파. 양파를 채 썰어 캐러멜화 될 때까지 오래도록 볶아 양파 수프를 끓여보라. 얼마나 달고 고소하고 깊은지. 거기에 딱딱하게 굳은 빵 몇 조각이 합해지면 입안에서 살살 녹는 양파 수프 완성. 참으로 천생연분의 맛이다.

돈키호테가 무수한 고난 속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을 때, 산초가 굳은 빵 하나를 내밀며 이런 말을 했다. 빵과 양파만 있다면 어떤 고난도 견딜만하지 않겠느냐고. 당신 옆에 내가 있고, 이렇게 빵도 있으니 괜찮은 거 아니냐고.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라도 가겠다고. 빵과 양파처럼 딱 붙어서 우리 함께. 이것은 지지와 응원의 다른 말. 어쩐지 눈물 나게 달콤한 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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