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 10조 미만은 중견기업’ 제도 허점
지난해 카카오에 입사한 김모(29)씨는 입사 직후 정부가 지원하는 청년내일채움공제에 가입했다. 김씨가 3년간 600만원을 적립하면 정부와 기업이 돈을 보태 5배(3,000만원)의 목돈으로 불려주는 ‘알짜’ 혜택이었다. 김 씨는 “대기업이라 당연히 안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회사 게시판에 신청 안내가 있어 뜻밖이었다”고 말했다. 자산총액 8조5,000억원(2017년)에 달하는 기업에 다니는 직원이 중소기업 취업자의 소득 보전을 위한 정책의 수혜를 받고 있는 것이다.
30곳에 가까운 대기업 집단이 제도상 허점으로 중견기업의 지위를 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계열사 수로는 751개에 달한다. 중소ㆍ중견기업에 돌아가야 할 재정 지원이나 세제 혜택이 대기업으로 샐 가능성이 있는 만큼 보다 정교한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7일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공정거래법상 대기업 집단으로 분류되는 ‘공시대상기업집단’은 지난해 5월 기준 60개인 반면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은 32개다. 공시대상기업집단에 속하지만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는 속하지 않는 28개 기업집단은 대기업이면서도 중견기업에 속하는 ‘이중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 카카오, 셀트리온, 이랜드, 아모레퍼시픽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상황은 공정위가 2016년 6월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기준을 자산총액 기준 5조원에서 10조원으로 상향 조정하면서 촉발됐다. 또 다른 대기업 분류 기준인 공시대상기업집단의 자산총액 기준은 5조원으로 유지됐다. 그런데 중견기업을 규정하는 중견기업 특별법은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 속하지 않는 기업을 중견기업으로 정하고 있다. 자산총액이 10조원에 미치지 못하는 대기업(공시대상기업집단)이 자동으로 중견기업 지위를 획득하게 된 연유가 이렇다. 공정위는 당시 “중견기업은 매출액 기준을 충족해야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기존 중소기업 혜택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중견기업에 대한 지원이 속속 신설되면서 공정위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빚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청년내일채움공제 사업이다. 대기업과의 임금 격차를 줄여 구인난에 허덕이는 중소기업을 지원한다는 취지로 2016년 7월 만들어진 사업인데 같은 해 9월부터 당시 중소기업청의 법규 개정으로 중견기업도 신청 가능하게 됐다. 도입 당시에는 공제에 가입한 신규 취업자가 2년간 300만원을 적립하면 정부와 기업이 900만원을 보태 1,200만원을 돌려받을 수 있었던 것이 현재는 2년간 300만원 적립시 1,600만원, 3년간 600만원 적립시 3,000만원으로 지원 규모가 커졌다. 혜택이 큰 상품이다 보니 지난해엔 상반기에 조기 마감돼 추경을 통해 지원 규모를 늘리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카카오 같은 대기업이 중견기업 지위를 활용해 중소기업과 혜택을 나눠 가진 셈이다. 기업이 지원하는 몫(3년 600만원)도 정부가 채용유지지원금 형태로 적립하기 때문에 사실상 기업 부담 없이 직원 월급을 늘려주는 셈이다. 고소득자에게 혜택이 돌아간다는 비판이 일자 정부는 올해부터 월 급여총액 500만원 초과 시에는 가입이 불가능하다는 임금 상한액 규정을 신설했지만 여전히 중견기업 대졸 신입사원 평균 초임(2017년 기준 연 3,147만원)의 두 배에 가까운 수준이어서 대기업집단 계열 직원들이 여전히 수혜를 받을 수 있는 여건이다.
더구나 중견기업으로 분류된 이들은 해외 진출이나 연구개발(R&D) 등 각종 국가 지원사업의 대상으로 선정될 수 있다. 매출액 규모에 따라 지원 혜택이 달라지는데 매출액이 3,000억원 미만인 계열사의 경우 투자나 고용, R&D를 유도하기 위한 세액공제, 세액감면 혜택도 누릴 수 있다. 대기업집단 소속이라도 계열사에 따라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셈이다.
중소기업에 투입돼야 할 재원이 대기업에서 낭비되는 상황을 막으려면 중견기업 지정 기준을 새로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기준이 3년마다 조정 가능하기 때문에 2016년과 마찬가지로 대기업이 중견기업으로 대거 바뀌는 사례가 다시 나타날 수 있어서다. 박충렬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이 아니라면 중견기업이라는 현재 기준으로는 대기업의 제도 편승을 막기 힘들다”며 “중소기업 범위 기준으로 활용하는 업종별 매출액 기준 등을 도입해 중견기업의 상한선을 정하는 방안을 검토할 때”라고 지적했다.
세종=박세인 기자 sa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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