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일러스트=김경진 기자

저는 미국에서 박사과정 중인 대학원생입니다. 제 인생은 남 부러울 것 없었어요. 학창시절부터 공부를 잘해 서울대에 합격했고, 졸업 후에는 고시에 붙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부잣집 딸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그런데 3년 전 이혼하면서 부모님과 회복되지 못할 만큼 갈등의 골이 깊어졌어요. 부모님은 3년이 지나도록 가족에게조차 제 이혼사실을 숨깁니다. 다른 사람이 제 이혼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얘기하는 게 너무 싫다면서요. 그러시면서 최근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 재혼 얘기를 꺼냈더니 그마저도 심하게 반대하셨어요. 여자친구의 학벌이 좋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기 부끄럽다고 합니다. 전처보다 훨씬 대단한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제가 이제 본인의 기대를 저버렸다며 이기주의자, 불효자라고 폭언을 하고, 집에 있는 제 물건을 다 버리고 인연을 끊겠다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합니다. 마치 떼쓰는 아이처럼요. 처음에는 단순히 결혼을 반대해서라고만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부모가 제 인생에 지나치게 간섭해왔고, 앞으로도 하려고 한다는 걱정이 듭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서 자란 아버지는 국내 대기업에서 생산직으로 평생 일하셨어요. 그래서 그런지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돈과 체면이라고 하십니다. 제가 어렸을 때 공부를 잘했는데도 실수했다고 때리고,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고 자주 때렸습니다. 시시때때로 책상검사를 해 장난감 같은 물건이 나오면 엄청나게 혼이 났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저는 늘 무서웠어요. 섣불리 아버지에게 반항도 못했어요. 서울대에 진학하면서 자취를 했지만 그 뒤로도 갈등은 계속됐어요. 아버지 회사에서 등록금 지원을 받는데도 저한테 장학금도 못 받느냐고 화를 내었고, 술을 마시거나 전화비가 많이 나와도 혼이 났습니다. 결혼하고 직장생활 그만두고 유학을 갈 때도 아버지는 길길이 날뛰었어요. 세상물정 모르고 좋은 직장을 그만둔다며 장인을 막무가내로 찾아가 말려달라고 할 정도였어요.

게티이미지뱅크

그런 아버지 밑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친구 같은 어머니가 있어서였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결혼 후 어머니와도 갈등이 생겼어요. 전처와 함께 식사를 하다가 전처가 어머니께 접시를 건네면서 무심코 제 머리위로 접시가 지나갔는데 어머니가 ‘남편 재수없게 뭐 하는 행동이냐’고 핀잔을 줬습니다. 또 어머니는 사주를 보러 다니시며 제 자식운이 좋지 않다고 부부생활과 아이문제에 간섭이 심했습니다. 그러면서 전처 문제로 사이가 틀어졌어요.

마흔을 앞두고 아직도 이런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롭습니다. 부모를 안 보고 살면 그만이지 싶다가도 어머니도 눈에 밟히고, 계속 마음이 괴로울 것 같습니다. 다시 결혼해 가정을 꾸려도 제가 너무 싫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닮을까 두렵기도 합니다. 어떻게 제 부모로부터 벗어나 제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박진호(가명ㆍ38ㆍ학생)

진호씨, 마음의 산전수전을 다 겪어왔을 당신의 인생이 참으로 가여웠어요. 당신의 아버지는요, 제가 생각하기에 성실하고,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강하고, 올곧은 분이었던 것 같아요. 자식을 굉장히 잘 키우려고 애쓰고, 잘 가르치고, 올바르게 키우겠다고 나름 노력했어요. 그래서 아버지 당신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고, 항상 옳다고 생각할 거에요. 특히 자식 문제에 있어 자식을 잘 키우려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은 모두 옳고 항상 맞는 것이라는 아주 공고한 신념을 갖고 있지요.

그런데 진호씨, 아버지의 이런 사랑은 성숙한 사랑이 아니에요. 너무나 미성숙해요. 안타깝지요. 항상 옳은 자신의 생각과 말을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전혀 고려하지 않아요. 자신이 언제나 옳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식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진호씨가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진호씨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반대로 아주 열렬히 사랑했지요. 그런데 그 사랑이 너무나 미숙해 자식에게는 엄청나게 큰 상처의 화살이 됐다는 것을 본인은 모르고 있지요. 왜냐면 본인은 항상 옳았고, 진호씨를 잘 키우기 위해서였다고 믿으니깐요.

이런 아버지의 생각과 감정은 매우 요구적이고 강요적이에요. 본인의 감정이 옳고 맞으니 이를 상대에게 끊임없이 요구할 거에요. 그리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상대나 자식을 순식간에 몹쓸 사람, 불효자로 만들어요. 진호씨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심지어 너무 잘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진호씨를 불효자로 만들어 버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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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이렇게 된 데는 힘들게 자랐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많이 겪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시절을 겪은 부모는 자칫 잘못하면 매우 강요적으로 변합니다. 매사 불굴의 의지로 투쟁해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자식이 아무리 어려운 일을 겪어도 부모로서 도와는 주지만 ‘어서 빨리 털고 일어나. 네가 부모를 생각한다면 빨리 털고 일어나는 게 도리지’라고 합니다. 기다려주고, 설사 잘 극복하지 못하더라도 격려하고 지지해주는 것이 부모가 응당 해야 할 일인데도 그렇게 하질 않죠. 그래서 자식은 그런 부모 밑에서 자신이 잘못한 게 없어도 어려운 일을 극복하지 못하면 추락해버립니다. 자신이 한심한 사람, 쓸모 없는 사람,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한없이 무력해집니다.

아마도 진호씨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끊임없이 성적과 성공, 출세를 요구 받았을 테고 아버지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는 불안하고, 겁이 났을 거에요. 진호씨가 인생이 부모로부터 간섭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진호씨가 자기 인생에서 주인공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진호씨가 주도적으로 결정하고도 불안했을 거에요. 진호씨는 아버지로부터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거에요. 특히 아버지는 결과를 중시하기 때문에 결과가 좋으면 진호씨도 괜찮지만, 결과가 좋지 않으면 진호씨 스스로 불안해지고, 나쁘고, 한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돼요.

아버지와 같이 늘 자신이 옳고 맞는 사람들은 융통성 있는 사고를 하기 힘들어요. 어떨 때는 굉장히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요. 아마 진호씨의 이혼이 아버지에게는 그런 부분일 거예요. 아들이 결혼생활을 행복하지 않다고 하면 정상적인 부모는 ‘안타깝지만 네가 이혼을 해서 심신이 편해진다면 이혼해도 괜찮아’라고 합니다. 하지만 진호씨의 아버지는 ‘어떻게 감히 네가 이혼을 생각해’라고 반응하고, 아들이 절대 이혼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을 거에요. 결국 이혼한 아들을 용서할 수 없고, 여전히 자신이 옳기 때문에 진호씨에게 뭐라고 하는 겁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다른 분이죠. 진호씨를 헌신적으로 키웠을 거고, 이혼한 것이 마음이 아프지만 속으로는 ‘네가 힘들다면 이혼해도 괜찮다’고 생각은 했을 거에요. 그런데 아버지로부터 진호씨를 보호하기에는 역부족이었어요. 남편을 이길 힘이 없었을 거에요. 마음이 따뜻하고, 여린 편이죠. 그런데 이런 분들은요, 어떤 하나에 매달리지 않으면 삶을 버틸 힘이 없어요. 아마 어머니에게 진호씨가 그런 존재였을 거에요. 어머니는 진호씨에게 매달리고 의지했어요. 접시 사건에서 보듯 전처와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접시도 어머니는 마치 큰일이라도 일어난 모양 크게 반응하는 겁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이런 부모가 변할까요. 안타깝지만 아마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도 부모는 ‘내가 너를 키우려고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데’라고 말할 거에요.

그래요, 진호씨가 달라져야 해요. 일단 자기 주도성을 강화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방법이에요. 자기 주도성은 인생에 많은 것들을 본인이 주도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하고, 이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와 실패를 받아들여서 꿋꿋하게 겪어 가는 것이에요. 진호씨가 이혼을 하고, 미국에 남아서 공부를 계속 하고, 새로운 사람과 재혼을 꿈꾸는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면 됩니다. 재혼을 하더라도 백년해로를 할지 안 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의 결정이 최선의 결정이라 생각한 후 두려워하지 말고 결정하고, 그 뒤에 따르는 갈등과 실패도 주도적으로 해결하고 겪으면 됩니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나쁜 일도 아니고, 잘못한 일도 아니니 그렇게 스스로 결정하면 됩니다. 당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생각이 기우는 대로 해보세요.

아버지와는 거리를 두는 것이 의절을 피하는 방법이에요. 아버지와 진호씨 관계의 갈등이 아니라, 이는 아버지 자체의 문제이에요. 당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요. 그렇게 받아들이고,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의 한 인간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도움이 될 거예요. 당신이 무능하거나 잘못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는 늘 ‘너 잘 되라고 하는 얘기다’를 앞세우기 때문에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결정을 하든 늘 백전백패입니다.

오해를 풀려고 하거나 이해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미국에 있는 것이 당신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요. ‘내가 알던 아버지구나, 아버지는 원래 그런 분이셨지’하고 생각하면 상처를 덜 받을 수 있을 거에요. 아버지의 말에 ‘아버지가 또 나를 힘들게 하시는구나, 여전히 말이 안 통하네’라고 하면 그게 상처이지요. 아버지와 굳이 감정적으로 얽히고, 아버지에게 왜 그러냐고 항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당신의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현명하고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소소한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잘 알고 있지요. 마음이 잘 통하는, 서로 잘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분과 따뜻하고 편안한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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