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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명의 이슬람 문명기행] 안달루시아의 관용, 르네상스 밑거름으로

입력
2019.02.16 04:4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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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어우러진 스페인 남부 

※ 이슬람 국가 모로코에서 이슬람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정명 명지대 교수가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이슬람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매주 들려드립니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게티이미지뱅크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게티이미지뱅크

오늘날 스페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항해, 무적함대, 산티아고 순례지,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레알 마드리드 프로 축구단 등일 것이다.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약 800년 동안 스페인이 이슬람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 시기 동안 무슬림들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며 세비야, 코르도바, 그라나다, 톨레도 등과 같은 도시를 건설했다. 이 도시들은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아프리카와 유럽, 아랍과 라틴 문화를 하나로 녹여 내는 용광로 역할을 하며 유럽의 르네상스 개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사막에서 출발한 이슬람 제국,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을 정복하다 

안달루시아는 역사적으로 매우 특이한 지역이었다. 중세 기간 동안 무슬림과 그리스도교도가 직접 만날 수 있었던 문명의 경계선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안달루시아는 기원(紀元)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로마제국 영토의 일부였다. 그러나 5~8세기에 이 지역은 게르만족의 일파였던 서(西)고트족의 차지가 됐는데, 당시 그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 소속의 그리스도교도들이었다.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 사이에 놓인 지브롤터 해협. 지브롤터란 명칭은 711년 스페인을 정복한 타리크 장수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 해협을 건너 이슬람 문명이 스페인까지 전파됐다.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 사이에 놓인 지브롤터 해협. 지브롤터란 명칭은 711년 스페인을 정복한 타리크 장수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 해협을 건너 이슬람 문명이 스페인까지 전파됐다.

8세기 무렵 안달루시아는 급격한 정치사회적 격변을 경험했다.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 메카에서 예언자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된 이슬람이 중동 전역에 전파됐고, 661년 최초의 이슬람 제국인 우마이야조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건설됐다. 우마이야조는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 하에 있었던 북아프리카 영토를 하나씩 복속시킨 후, 마침내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스페인 지역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안달루시아는 그리스도교 지역에서 이슬람 지역으로 바뀌었다.

 ◇안달루시아,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문명의 경계선이 되다 

이슬람 세력이 안달루시아를 본격적으로 다스리기 시작한 때는 우마이야조가 750년 압바스조에 의해 멸망하면서부터다. 멸망한 우마이야 왕가의 일족은 다마스쿠스를 버리고 안달루시아로 피난해 756년 이곳에 후기 우마이야조(756~1031)를 개창하고 새로운 수도 코르도바를 건설했다. 10세기 무렵 코르도바는 인구가 45만 명에 달하는 서유럽 최대 도시로 성장했으며, 호학가로 유명했던 알하캄 2세의 통치 시기에는 이곳 도서관에 약 40만 권의 장서가 보관돼 서유럽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1031년 후기 우마이야조는 내부 분열로 멸망했지만 그 이후에도 무라비툰조, 무와히둔조, 나스르조 등을 비롯한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이슬람 왕국이 안달루시아를 1492년까지 지배했다. 이슬람 세력이 존속했던 약 800년 기간 동안 스페인은 안달루시아를 중심으로 한 남부 지역에서 이슬람 세력이, 그리고 카스티야, 레온, 나바라, 아라곤 등을 중심으로 한 북부 지역에서 가톨릭 세력이 우세했다. 그 결과 스페인의 영토에는 자연스럽게 이슬람 문명과 그리스도교 문명이 병존하는 경계선이 형성됐다.

 ◇안달루시아의 콘비벤시아가 만든 독특한 건축 양식 

이슬람 세력의 안달루시아 지배에 대해 역사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갈라진다. 첫째는 이슬람 세력과 가톨릭 세력이 상대방의 영토를 뺏기 위해 끊임없이 군사적으로 충돌했다는 견해다. 실제로 양 세력은 톨레도, 코르도바, 세비야 등 주요 도시를 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1492년 알함브라 궁전으로 유명한 그라나다 왕국이 가톨릭 세력에 의해 함락됨으로써 스페인에서의 이슬람 세력은 완전히 종적을 감추게 되었다.

둘째는 군사적 충돌은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고 평상시에는 오히려 이슬람 세력과 가톨릭 세력이 상대방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그 결과 ‘콘비벤시아(Convivencia) 전통’이 유지되었다는 견해다. 콘비벤시아는 스페인어로 ‘공존’을 뜻하는데 안달루시아에 거주했던 무슬림, 그리스도교도, 유대인 등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면서 독특한 융합 문화를 창조하는데 기여했다는 뜻을 담은 용어로도 사용된다.

실제로 안달루시아 지역을 여행해 보면 콘비벤시아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코르도바, 세비야, 그라나다의 옛 가옥이나 성채를 보면, 이슬람‧비잔티움‧고딕 건축 양식이 교묘하게 섞여 있으면서도 미적으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일부 성당이나 모스크는 통치자가 이슬람 세력과 가톨릭 세력을 오가며 바뀌는 바람에 두 가지 건축 양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코르도바의 대성당이 대표적 예다.

전체적으로 모스크 건축물임을 알 수 있는 코르도바 대성당 외부
전체적으로 모스크 건축물임을 알 수 있는 코르도바 대성당 외부

코르도바의 대성당은 원래 후기 우마이야조의 창건자 압둘 라흐만 1세가 785년에 건설한 신자 2만 5,000명 수용이 가능한 대규모 모스크였다. 하지만 1236년 코르도바가 가톨릭 세력에 의해 탈환되면서 그 용도가 성당으로 바뀌며 개축되었다. 덕분에 오늘날 밖에서 보면 모스크의 외형을 갖추고 있으면서 동시에 내부는 가톨릭 성당의 모습과 갖춘 건물이 되었다. 이처럼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건축 양식이 한 공간 안에 융합돼 안달루시아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빚어낼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이방인의 것일지라도 타인의 문화적 유산을 함부로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켰던 콘비벤시아의 전통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모스크에서 가톨릭 성당으로 개조된 이후 코르도바 대성당 내부의 모습
모스크에서 가톨릭 성당으로 개조된 이후 코르도바 대성당 내부의 모습

 ◇안달루시아의 번역운동, 유럽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되다 

안달루스의 콘비벤시아 전통이 인류에게 준 또 하나의 선물은 ‘아랍어-라틴어’ 번역 운동일 것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중세의 유럽은 ‘암흑의 시기’라고 표현될 만큼 교회의 권위에 눌려 자유로운 이성(理性) 학문의 연구가 억제됐다. 이에 반해 이슬람 세계는 8세기 이후부터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등으로부터 선진 의학, 수학, 천문학, 철학 등의 서적을 수입해 아랍어로 번역한 후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 아랍어로 번역되거나 정리된 고대 학문의 양과 수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방대했으며 그 중에는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누스의 의학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서, 유클리드의 수학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 등이 포함돼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서 '알마게스트'의 아랍어 필사본. 중세기간 동안 유럽에서는 이 저서의 그리스어 원본이 유실되었고, 12세기에 안달루시아에서 아랍어본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소개됐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서 '알마게스트'의 아랍어 필사본. 중세기간 동안 유럽에서는 이 저서의 그리스어 원본이 유실되었고, 12세기에 안달루시아에서 아랍어본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소개됐다.

11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이성과 지혜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서는 상당수의 그리스 원본이 유실된 상태였고,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학자도 태부족했다.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유럽인들은 무슬림 학자들이 아랍어로 번역하고 주해한 고대 그리스 학술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가 서구의 첨단 과학, 의학, 기술 등을 배우기 위해서는 영어, 독일, 라틴어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듯이 당시 유럽인들은 수준 높은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아랍어를 익히고 아랍어 서적을 번역하는 것이 필수적 과정이라고 여겼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등 유럽 각지의 내로라하는 번역가들이 안달루시아에 몰려들어 아랍어 학술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오늘날 서구의 전문 학술 용어 가운데 ‘연금술(Alchemy)’ ‘알코올(Alcohol)’ ‘대수학(Algebra)’ ‘알고리즘(Algorithm)’ ‘알칼리(Alkali)’ 등이 모두 공통적으로 ‘알(Al)’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다름 아닌 아랍어의 정관사에 해당하는 단어다. 이를 통해서도 당시 번역 운동이 유럽 학문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서 안달루시아가 번역의 중심지로 각광받은 주된 이유도 콘비벤시아 전통 때문이었다. 비록 이 지역은 이슬람 세력과 가톨릭 세력 간에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접전이 벌어지는 대결의 장소였지만 무슬림 통치자건 그리스도교 통치자건 일단 정복을 완료한 후에는 피정복민에 대해 관용을 베풀었다. 그 덕택에 안달루시아는 무슬림, 그리스도교도, 유대인 주민들이 큰 갈등 없이 공존할 수 있는 다문화 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아랍어 원전을 히브리어로 옮기고 이것을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는 릴레이식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이 같은 번역 운동은 12세기 무렵 최절정에 달했고, 톨레도, 코르도바, 세비야 등의 번역학교는 이슬람 세계의 선진 학문이 유럽으로 전파되는 교두보 역할을 하며 르네상스 운동을 촉발시켰다.

김정명 명지대 아랍지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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