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김수환 추기경 선종 10주기]
벨기에 출신 배현정 원장 “44년전 만남 때 도시빈민 위한 삶 권유해”
변두리 판자촌에 복지센터 세우고 의사 면허 따 빈민 곁 지켜
안광훈 신부, 추기경 부름 받고 목동으로… 재개발에 쫓겨나는 이웃 돌봐
“원래는 소록도에서 평생 이웃과 살 생각이었어요. 저 자신을 어디에 써야 할지 동료들과 고민하던 차에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말씀하셨죠. 물론 소록도도 중요하고 시골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나라엔 급한 일이 생겼다고요. 수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아무것도 없이 서울을 향해 오는데 이들이 대부분 변두리에, 판자촌에, 빈민가에 모여들고 있다고. 그들 곁엔 아무도 없다고. 그러니 교회가 이 고통을 돌봐야 한다고요.”
서울 금천구 시흥동 소재 가톨릭 의료 봉사 기관인 전진상 의원의 배현정(74) 원장은 생생하게 기억했다. 벨기에 출신의 간호사 ‘마리 헬렌 브라쇠르’로 1972년 한국에 도착하기 전, 평생 독신생활과 봉사를 결심한 터였다. 그는 가톨릭 평신도 선교봉사단체인 국제가톨릭형제회(이하 AFIㆍ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 회원이다. AFI 회원은 자신을 위해서는 무엇도 소유하지 않고 전적으로 억압받는 이들, 가장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는데 삶을 봉헌한다.
처음엔 고통받는 한센인의 마을 소록도를 포함해 “이웃과 함께 살 곳”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 1975년 다시 찾은 서울에서 같은 AFI 회원인 최소희 약사, 유송자 사회복지사와 앞길을 고민하던 중이었다. 늘 AFI 회원의 삶에 큰 관심을 뒀던 김 추기경이 세 사람에게 권유한 것은 ‘도시 빈민을 위한 삶’이었다.
“우리 팀에서 판자촌에 들어가 파일럿 프로젝트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죠. 즉 저희를 보고 다른 단체들도 판자촌을 위해 힘을 보탰으면 좋겠다고, 좋은 자극이 됐으면 좋겠다고요. 실제로 그런 활동이 이어졌어요.” 배 원장은 회고했다.
당시는 47세의 나이에 최연소 추기경으로 서임한 김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 7년 차, 추기경 6년 차를 맞았을 때다. 평생 “높은 담을 헌 교회, 약자를 위하는 교회”를 강조한 김 추기경의 눈을 사로잡은 ‘가장 고통받는 자’가 도시 빈민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의 우려대로 급격히 늘어난 도시 빈민의 처참한 주거환경, 철거, 강제 이주, 투쟁, 진압, 고립의 고통은 그 후 30~40년 넘게, 또 여전히 한국 사회를 압도한다.
2009년 2월 16일 선종한 김 추기경 10주기를 맞아, 그의 뜻에 발맞춰 평생 빈민 곁을 지킨 이들을 만났다. 전진상 의원의 공동 설립자인 배 원장과 삼양주민연대 이사장 안광훈(79) 신부다. 이들이 기억하는 김 추기경은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의 동반자가 돼라”던 큰 어른이다. 격동의 근현대를 지나오는 동안 존엄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철거민의 삶을 아파하던 신앙인이다.
12일 진료실에서 만난 배 원장은 “서울 변두리 판자촌 10곳을 둘러 본 뒤 금천구 시흥동에 터를 잡았다”고 했다. 그렇게 배 원장, 최 약사, 유 사회복지사가 함께 1975년 설립한 것이 전진상의원의 전신인 전진상 가정복지센터다. 전(全)은 온전한 자아봉헌, 진(眞)은 참다운 사랑, 상(常)은 끊임없는 기쁨의 정신을 뜻한다.
“도시 빈민들의 처지가 심각하다”는 김 추기경의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다. 배 원장이 목도한 당시 판자촌의 실상은 “충격적”이었다. “물도 없고, 쓰레기는 쌓여 있고. 사람들이 급한 대로 2, 3일만에 판잣집을 지어 살았죠. 바람 불면 날아가고, 비가 오면 물이 새든지 무너지든지. 결핵 환자는 엄청나게 많고, 어린이들은 예방접종을 하나도 못 맞고, 홍역, 백일해, 파상풍으로 죽는 사람들이 쏟아지고. 전국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현상이 매일 벌어졌어요. 결핵사업과 예방접종만은 꼭 필요하다. 급하다. 그 생각뿐이었죠.”
센터 역시 7년간 상수도 없이 물을 구하러 다니며 지내야 했다. 총체적 난국이 계속됐지만 배 원장은 힘들다기보단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3만 5,000명이 사는 동네에서 사람들은 죽어가는데, 가까운 보건소도 없고, 119 출동이 가능하지도 않았고, 병원에 가더라도 돈을 낼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라며 “의사가 절실해 처음에는 토요일마다 의사 출신의 김중호 신부님이 봉사자들과 함께 와서 진료를 봐줬다”고 했다.
“비 오는 날이면 쭉 우산을 들고 앉아 기다리기도 했는데, 센터까지 오기도 힘든 사람들이 많아서 매일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면서 환자들을 찾아다녔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왕진은 제일 중요한 일이에요.” 전문의들의 진료가 없는 날에도, 분주한 치료는 계속됐다. 약을 보급하고, 각종 검사를 위해 이리저리 다른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러 뛰어다니며 동분서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보다 못한 김 신부가 “여기에도 상주 의사가 필요하다”고 제안하고 나섰다. 배 원장은 웃으며 “제가 외제 간호사, 국산 의사가 된 사연”을 돌이켰다. “신부님께서 이 팀에서 누가 의사가 돼야겠다고 하시기에, 난 아니겠지 안심했죠. 아무리 한국말을 배웠어도 그걸 어떻게 하냐 싶어서요. 몇 년 동안 산동네만 돌아다니며 바빴기 때문에 진짜로 공부는 하기 싫었어요.”
중앙대 의대 학장 면담을 신청한 김 신부 옆에 앉아서도 안심은 계속됐다. “이 사람은 간호사다. 근데 돈은 없다. 앞으로도 없을 거다. 대신 의학을 공부하면 평생 이 나라에서 봉사할 거다. 그러시더라고요. 그런데 며칠 뒤 편입 시험은 한 번 쳐보라는 답이 온 거예요. 정말 공부는 싫었는데, 제 일생의 악몽 중 하나에요.(웃음) 그래도 막상 편입하고 나서는 항상 졸업할 수 있다고 안심시켜주는 친구들 덕분에 졸업에 국가시험까지도 버텼죠. 김 추기경님이 정말 좋아하셨어요.”
배 원장이 가톨릭 의과대학에서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되고, 벨기에에서 호스피스 공부를 하고 돌아온 뒤로는 매일 진료와 가정 호스피스 활동이 시작됐다. 어려서부터 탄광촌에서 약사로 일하는 부친을 보며 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만났던 배 원장은 “죽음을 앞둔 이들이야 말로 가장 동반자를 필요로 하는 이웃이라고 생각했다”라며 “마지막까지 존엄한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은 바티칸 교황청에서도, 서울대교구에서도, 김 추기경도 관심이 컸던 일”이라고 했다.
매달 1,500명 넘는 환자를 돌보고, 산꼭대기까지 왕진을 거듭하고, 죽음을 앞둔 환자들과 함께 하는 일은 고됐지만 보람됐다. 김 추기경이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늘 뭐가 힘든지, 잘 되고 있는지 묻고 개인적인 생활에 대한 관심이 크셨어요. 시흥동 마을 꼭대기까지 올라가기도 하고. 사람들이 ‘추기경님 아니세요?’하면 ‘제가 그런 말 많이 들어요’ 하셨죠.”(웃음)
배 원장의 부모님이 한국을 찾을 때마다 식사도, 여행도 함께했다. 함께 용문사에 갔던 일은 배 원장의 마음을 울렸다. “마리 헬렌아 하고 부르시곤 ‘네가 대성당에 가면 마음이 움직이는 것처럼 한국 사람들은 절에 오면 마음이 움직인다’고 하셨죠. 그렇게 사고방식이 넓은 분이었어요.”
김 추기경은 매년 1월 1일이면 AFI 회원들과 식사를 했다. 김 추기경과 30~40명의 AFI 회원들이 한복을 입고 윷놀이를 하며 방이 떠나가도록 깔깔 웃는 모습은 늘 새해 첫날을 여는 진풍경이었다. “한 가지 중요한 건 우리가, 추기경님이 특별하게 생각한 유일한 팀이 절대 아니었다는 거죠. 누구에게 물어봐도 ‘우리를 특별하게 생각하셨어’라고 할 거예요. 그게 바로 그분의 훌륭하신 점입니다. 누구에게든 ‘아 추기경님은 나를 정말 특별히 좋아하시나 봐’라는 생각이 들도록 인간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는 것.”
선종 10주기를 맞아 배 원장이 돌이키는 김 추기경의 정신은 “인간 존엄성의 회복”이다. 그는 “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나 다른 면으로나 굉장히 발전했지만 아직 소외된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다”라며 “처음 한국에 왔을 땐 버려지는 아이들이 너무나 많았는데, 지금은 버려지는 고령자들이 너무나 많다”고 했다.
“특히 만성병을 지닌 고령자들은, 걷지 못하고 병원도 못 가고, 계단이 많은 연립주택에서 나올 수도 없어요. 호스피스 입원을 시키고 싶어 아무리 기다려도 가족이 나타나지 않는 환자가 많고요. 그 안에서 우리가 활동해야 하고요. 사회보장제도가 아직 부족하고, 그것만으론 100% 해결 안 돼요. 대한민국 온갖 주민이 나만 좋고, 나만 성공하겠다고 생각하면 함께 살 수 없는 사회가 올 거예요.”
생전 늘 강조했던 김 추기경의 강론을 되새겼다. “늘 인간답게, 누구든지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 그 정신을 우리가 벗어나면 안 된다고 하셨죠. 우리가 그 마음을 다시 생각해야 해요. 사회, 의학, 경제도 발전했고 판자촌은 없어졌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으니까요. 대한민국 모든 주민이 그걸 다시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13일 서울 강북구 삼양주민연대 사무실에서 만난 안광훈 신부에게도 김 추기경은 늘 “강제 철거로 길거리에 나앉은 이들을 걱정하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약자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 애썼던” 분이었다.
뉴질랜드 출신 브레넌 로버트 존으로 불렸던 그는 사제 서품을 받은 뒤 1966년 25세 때 한국에 와 안 신부가 됐다. 강원 정선에서 시작한 한국 생활 대부분을 서울 목동, 삼양동 등에서 재개발과 철거로 고통받는 이웃들과 함께 보냈다. ‘빈자의 친구’, ‘달동네 신부님’으로 불린 이유다. 지금도 삼양주민연대 이사장이자,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회사목국 빈민사목위원회 일원으로 삼양동(솔샘) 선교본당 평화의 집을 지킨다.
“정선도 빈민운동이 절실한 가난한 시골 동네였지만, 1979년 1년 동안 안식년을 보내고 81년 귀국하니 김 추기경님이 목동으로 가라 하시더라고요. 목동 성당 주임을 하게 됐는데, 신자들 대부분이 신시가지 개발로 쫓겨나 안양천 변 달동네로 밀려난 분들이었어요.”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김포공항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에 대한 대대적인 정부 측 정비가 이뤄졌던 것. 안 신부는 “정부가 외국인들에게 깨끗한 모습을 보이겠다고, 모범 도시를 만들겠다고 보상 없이 주민들을 다 쫓아내는 바람에 그때부터 세입자, 주택, 주거권, 철거, 재개발 문제에 큰 관심을 두게 됐다”라며 “용역 깡패들이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마구 때리고, 경찰은 바라만 보는 일이 반복됐다”고 했다.
“철거민들이 대책 회의할 공간조차 없어서 본당 강당이나 교리실을 내주기도 하고, 한 번은 전투경찰들이 이 철거민들을 연행하겠다고 문 앞까지 왔어요. 다음날까지 구청장, 경찰서장이 다 저를 쫓아와 이분들 내보내 달라고. ‘그분들이 스스로 가면 몰라도 내가 내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더니. 그럼 일단 밖에서 점심 먹고 와서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요. 내가 바보같이 거길 따라가는 바람에, 그 사이 주민들을 다 데려가 버렸어요. 그땐 정말 너무 화가 났었죠.”
그가 가장 안타까워했던 건 “세입자들이고 집주인이고 많은 이가 자신의 법적 권리조차 제대로 고지받지 못한 채, 어떤 계획도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폭력적으로 내쫓기고, 건설사만 이익을 보는 일이 너무 오래 여러 곳에서 반복됐다”는 점이다. 서울이 발전할수록 더 많은 곳에서 철거와 재개발은 이어졌고, 그럴수록 목동, 삼양동(미아동), 신림동, 금호동, 상계동 등 곳곳에서 빈민들과 함께하는 사제들이 늘어났다.
김 추기경이 서울대교구 자문 기구로 ‘도시 빈민 사목위원회’(현 빈민사목위원회)를 설립한 때는 이 무렵, 1987년 4월이다. “이건 교회 차원에서 연대해야 할 일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공동체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하셨죠. 빈민 지역에 선교본당을 만들었고, 이 선교본당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종교보다도 일단 함께 사는 것, 연대하는 거였죠.”
빈민사목위원회는 서울 상계동 철거 사태 등 정부 주도의 반강제적 철거에 맞서는 이웃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시작했다. 김 추기경은 수시로 현장을 찾았고, 직접 도시 빈민 문제 해결을 위한 공청회에 참가해 정부 정책이 빈민을 양산한다고 일갈했다. 김 추기경의 서울대교구장 재직 30년(68~98년)은 서울대교구 산하 복지시설이 150여 개로 늘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김 추기경이 다시 안 신부를 지금의 삼양동, 옛 미아 6동으로 보낸 때는 1992년이다. 삼양동 선교본당 초대 주임신부로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를 찾은 안 신부가 처음 한 일은 전셋집을 구한 것이다. “이 지역에서도 틀림없이 철거가 시작되겠구나 싶었는데, 정말 이사를 들어온 지 3년 만에 같은 일들이 반복됐죠.” 그의 전셋집은 세입자 대책위원회 회의실로 활용됐다.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 보장에 대한 교육, 임시 거주지 마련에 대한 요구 등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 넘쳤다.
설상가상으로 철거가 진행되는 와중에 IMF 외환위기로 실직자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성공회 나눔의 집이나 지역 주민들과 함께 실직자를 위한 사업단, 무료 취업상담소, 주거 복지 센터, 소액대출은행 등을 만들어 활동하던 게 지금의 ‘삼양주민연대’의 시작이다.
“주민들이 스스로 연대하고 공동체를 만들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게 핵심이에요. 지금은 예전 같은 용역 깡패나 재개발의 문제는 줄어들고, 복지가 좋아졌지만 아직은 할 일이 많아요.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들이 남아 있어요. 달동네, 산동네, 가난한 집이 다 눈에 보이지 않게 됐으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보기 힘들지만. 양극화 문제, 빈부 격차 문제, 공동체가 상실되고 서로 자기만 아는 문제는 더 심각하죠.”
선교본당 평화의 집에서는 고립 위기에 처한 지역 주민들을 위한 반찬 배달, 소외 위기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 운영 등이 계속된다. 남은 평생도 이웃과 함께 살 계획이라는 안 신부는 “교회는 사회를 초대하는 곳이 아니라, 사회로 나가야 하는 곳이라는 게 김 추기경님이 늘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라며 “교회를 위한 교회만큼 쓸모없는 것도 없다”고 말했다.
“신앙인이라면 특히 그런 추기경님 말씀을 기억해야죠.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 있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소외된 이들과 함께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야죠. 어느 옥탑에서 누가 죽어가도록 일주일, 열흘 동안 이웃이 모르는 지금 한국 사회에는, 다시 그런 말씀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com
◆사진과 말씀으로 보는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정신
정리=김혜영 기자
자료조사=박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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