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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아는 엄마 기자] ‘키도 경쟁력’이 된 사회… 키 크는 주사 맞는 아이들

입력
2019.02.16 13:0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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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아이와 함께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나섰다. 갈아탄 지하철에서 운 좋게 빈 자리가 생겨 아이와 나란히 앉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앞에 서 있던 한 아주머니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몇 살이냐고 물었다. 아이의 대답을 들은 아주머니는 자신의 손자와 나이가 비슷해 보여 궁금했다고 미소를 지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들은 아주머니는 저장돼 있던 사진 한 장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남자아이가 손가락으로 V 표시를 하며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자신의 손자라고 사진 속 아이를 소개한 아주머니는 대뜸 요즘 아이 엄마가 아이에게 이른바 ‘키 크는 주사’를 맞히고 있다며 안쓰럽다고 털어놓았다.

사진 속 아이의 키가 그리 작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더니, 아주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이 엄마가 지금보다 더 많이 키워야 한다며 손자를 계속 병원에 데리고 다닌다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이 방학 동안 많이 맞는다는 이른바 ‘키 크는 주사’ 얘기였다. 병원에 여러 차례 가야 하는 데다 아이가 힘들어할 수도 있어 이 주사를 맞히려면 방학 기간이 적기라는 얘기가 학부모들 사이에 공공연하다.

아이 키를 바라보는 학부모들의 시선은 성적과 비슷하다. 아이 키가 정상 범위 안에 들어도 주변 또래 아이들보다 작으면 성에 차지 않는다. 아이가 공부를 곧잘 하는 데도 친구보다 시험 점수를 낮게 받으면 학원을 더 보내고 싶어지는 마음과 비슷하다. 키 크는 주사의 주성분은 성장호르몬이다. 성장판을 도와 뼈가 잘 자라도록 촉진한다.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성장호르몬이 부족해서 키가 덜 크지 않을까 걱정하는 학부모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키 크는 주사 열풍으로 이어졌다.

건강기능식품 업체들이 너무나 쉽게 내뱉는 ‘키도 경쟁력’이라는 문구는 학부모들의 속을 헤집는다. 친구보다 키가 작은 아이가 친구의 동생으로 오해 받는 장면을 보여주며, 그래서 우리 아이 키를 키워야 한다고 결론을 맺는 한 건강기능식품 브랜드의 최근 TV 광고는 학부모들의 경쟁심을 부추겨 지갑을 열게 만든다. 키가 작은 부모는 이런 광고 앞에서 면목이 없다. 물려주진 못했지만 돈으로는 살 수 있는 경쟁력을 아이를 위해 확보해주지 않으면 부모의 역할을 다하지 않았다는 자책감마저 들게 한다.

소아내분비내과 전문의들에 따르면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는다고 다 원하는 만큼 키가 크는 건 아니다. 성장호르몬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나 성장하는 정도가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데다 유전이나 외부 환경 등 변수도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아이가 어른이 됐을 때 키를 예상해준다는 ‘공식’도 이런 이유로 늘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성장호르몬은 단순히 키만 키우지 않는다. 체내 다른 장기들을 같이 키우고 근육 양도 늘린다. 너무 과하면 몸이 붓거나 얼굴에 변형이 생길 수 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어떤 건강기능식품도 키 성장을 완벽히 보장해주지 못한다. 인터넷에서 거래되고 있는 먹는 성장호르몬, 스프레이 방식으로 혀 밑에 뿌리는 성장호르몬 같은 제품에 대해서도 전문의들은 효과를 확신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단백질인 호르몬은 입을 통해 소화기관으로 들어가면 분해되기 때문에 원래 갖고 있던 기능을 그대로 발휘하기 어렵다.

인체는 기계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가만히 모셔두기보다 자주 써야 기능을 충분히 발휘한다. 성장판 역시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자극을 받아야 제 역할을 한다. 성장판이 자극 받으면 성장호르몬 분비도 증가한다. 몸의 움직임이 성장판 주위의 혈액순환과 대사활동을 증가시켜 발달을 더 촉진시킬 수 있다. 걸어도 되는 상황인데도 아이들이 툭하면 뛰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이들의 성장판은 자라고 싶은 것이다.

키가 자라는 건 단순히 성장호르몬이나 성장판 같은 물리화학적 작용만이 아니다. 심리 상태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전문의들은 설명한다. 아이들이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는 상황이라면 뇌의 호르몬 조절 능력이 떨어져 성장호르몬 분비가 줄어들고, 성장이 늦어질 수 있다.

어쩌다 키마저 경쟁력이어야 하는 사회가 됐을까. 운동장 대신 학원에 앉아 있다 병원 가서 키 크는 주사를 맞아야 하는 아이들이 그저 안쓰럽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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