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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비환 칼럼] 공손의 미덕, 보이지 않는 조화의 손

입력
2019.02.15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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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이 없는 사회는 없다. 다원화된 현대사회일수록 갈등의 수위는 높다. 그럼에도 사회가 해체되지 않는 까닭은 갈등이 적절히 관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갈등을 조정하는 방식은 나라마다 큰 차이가 있다. 어떤 곳에서는 다양한 집단들 간의 자유로운 교섭과 타협을 통해서, 혹은 시민들이 선출한 대의원들이 토론과 합의를 통해 합리적으로 갈등을 해소한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국가가 강압적으로 조절하기도 한다. 전자는 시민들을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로 존중해주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방식이고, 후자는 시민들을 국가의 일방적인 명령과 지시를 받는 신민(臣民)으로 취급하는 권위주의 체제의 방식이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대체로 선진적인 민주주의국가는 갈등을 원만하게 조정하는 편이다. 반면에 일부 신생민주주의국가들은 갈등 해결에 번번이 실패한 끝에 권위주체 체제로 회귀하기도 한다. 또 다른 곳에서는 정치인들이 오히려 사회갈등을 증폭시킴으로써 시민들이 권위주의 시대의 일사불란한 갈등 해결 방식을 동경하게 만들기도 한다.

무엇이 성숙한 민주주의 체제와 미숙한 민주주의 체제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인가.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양자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헌법에 기본권이 잘 보장되어 있고 복수의 정당들이 존재하며, 삼권분립이 확립되어 있고 주기적으로 선거도 치러진다.(법의 지배 및 사법부의 독립은 신생민주주의의 가장 취약한 측면이긴 하다) 따라서 다양한 집단들 사이의 타협과 합의를 시도하며 법률과 정책을 입안ㆍ집행하는 정치인들의 낙후한 정치의식과 태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다. 무례하고 비양심적인 정치인들이 정치를 저급한 정쟁으로 타락시키고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함으로써 민주사회를 위기로 몰고 가는 것이다.

서구사회는 민주주의 제도를 이상적으로 운용하는 데 필요한 의식과 태도도 함께 발전시켜왔다. 16,7세기 유럽인들이 종교전쟁을 겪으며 습득한 관용의 윤리를 비롯해, 무수한 갈등과 정쟁을 겪으며 역지사지의 정신과 상호존중 및 공존공영의 미덕을 함양해왔다. 이런 미덕들이 없으면 제아무리 훌륭한 제도와 절차들도 무용지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명한 시민사회 이론가 에드워드 실즈(E. Shils)는 ‘시민사회의 미덕’(1991)이란 글에서 자유민주주의 제도들이 잘 작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치인과 시민들이 공손(恭遜)의 미덕을 잘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시민성(civility)의 핵심인 공손함은 시민들이 서로를 평등하고 존엄한 존재로 존중하는 태도이자 행위의 양식이며, 시민사회의 다양한 제도와 계층들에 대한 애착의 감정이다. 동시에 협소한 개인적 관심사를 넘어 전체 사회의 번영과 행복을 증진하려는 연대의식도 담고 있다.

공손은 무례함, 고압적인 안하무인의 태도,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필요는 아랑곳하지 않는 이기주의, 다른 사상과 의견을 용인하지 못하는 편협함, 약자들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무감각, 편파성과 불공정함, 폭력성 등 다양한 야만성(un-civility)과 대척점에 있는 문명사회의 핵심 요소다. 공손이라는 시민적 미덕이 결여된 곳에서는 어디서나 다양한 병리현상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갑질, 성희롱과 성차별, 양극화, 착취, 혐오, 배제, 폭력, 사기, 중상비방과 모독, 공갈과 협박, 뇌물과 매수(買收), 부당한 특혜 등 아직까지 우리사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온갖 병폐들이 발생한다.

물론 그 동안 우리나라가 일궈낸 첨단문명은 많은 외국인들이 부러워하는 매우 소중한 자산이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한없는 자부심과 긍지를 준다. 하지만 우리는 성숙한 선진문명을 성취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무엇인가가 아직 결여되어 있다고 느낀다. 나는 그것이 공손이라는 시민성의 덕목이라고 단언한다. 고도로 발달한 물질문명은 그에 걸 맞는 품위 있는 시민사회와 정치양식을 필요로 하는바, 공손이야말로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성취할 수 있는 문명화의 핵심 기제인 것이다.

깊은 반목과 대립으로 점철된 한국현대사는 극단적인 적대와 배제의 정치를 극복해야만 조화롭고 성숙한 민주사회에 이를 수 있다는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정치인도 시민도 이런 교훈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이런 자각을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용렬한 정치인들에게는 그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자신의 특권과 이익을 지키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새로운 정치의식과 미덕을 습득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훌륭한 정치인은 다르다. 그들은 새 시대가 요구하는 정치의식과 미덕을 체득ㆍ발휘함으로써 신체제와 문명을 구축해보려는 열정과 용기로 충일해 있기 때문이다. 설령 그런 목표를 직접 달성하지 못한다고 해도 국가가 발전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큰 기쁨이 된다. 먼저 정권을 잡고 있는 여권에서 이런 정치인들이 출현하기를 기대해본다.

김비환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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