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끈 음반 표지들
전설의 영국 록밴드 비틀스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존 레넌,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네 멤버가 영국 런던의 음악 스튜디오 에비로드 인근 횡단보도를 일렬로 걷는 모습이 다. 노래 ‘컴 투게더’가 실린 12집 ‘에비로드’(1969)의 표지 사진이다. 숱한 패러디를 낳았고, 비틀스의 상징과도 같은 이미지가 됐다. ‘에비로드’는 음반 표지가 가수에게 자화상이나 다름없음을 보여 준다.
‘눈으로 먼저’… BTS가 환기한 표지의 미학
음반 표지는 음악을 접할 때 더 강렬한 이미지로 작용했다. 음악을 듣는 이는 역설적이게도 음악을 눈으로 먼저 접했다. 음악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만큼 가수들은 음반 표지 제작에 각별히 신경 썼고, 그 표지엔 풍성하고도 은밀한 이야기가 실렸다. 음반 표지는 ‘제2의 음악’이자 이야기 보따리였다.
디지털 음원으로 음악 시장이 재편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사람들은 음반 표지를 잘 챙겨 보지 않는다. 제작자들은 예전에 비해 음반 표지 제작에 공을 들일 필요가 없어졌고, 자연스럽게 표지의 문화적 가치는 추락했다.
하지만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BTS)을 계기로 음반 표지의 중요성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너를 사랑하라’는 뜻의 ‘러브 유어셀프’를 주제로 2년에 걸쳐 낸 시리즈 음반 표지가 세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미국 유명 음악 시상식 그래미 어워즈를 주관하는 미국레코딩예술과학아카데미(NAPAS)는 지난해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한 방탄소년단의 ‘러브 유어셀프 전 티어’를 ‘베스트 레코딩 패키지’ 부문 후보에 올렸다. 방탄소년단은 2년에 걸쳐 시리즈 앨범을 내며 ‘너를 사랑하라’란 세계관을 음악뿐 아니라 앨범 표지로도 일관되게 보여줬다.
지난 10일 열린 시상식에서 방탄소년단의 앨범은 수상하지 못했지만, 반향은 적지 않았다. 21세기 아이돌그룹이 잊혀 가던 음반 표지 미학의 중요성을 환기시킨 셈이다. 방탄소년단 앨범을 계기로 국내 대중음악사에 도드라졌던 음반 표지를 돌아봤다.
‘직접 그린 동화 시리즈’ 산울림의 동심
“산울림 1집 ‘아니 벌써’(1977) 표지는 독특한 음악만큼 충격”(최규성 음악평론가)이었다. 아이가 그린 듯한 그림이 성인 가요 음반 표지로 떡 하니 활용돼서였다. 가수의 얼굴 사진이 표지를 장식하던 당시엔 파격이었다.
표지로 쓰인 그림엔 뜨거운 태양 아래 아이들이 장난감을 갖고 놀고 있다. ‘아니 벌써’ 등에 녹아 있는 동심과 익살을 보여 주려 한 시도였다고 한다. 산울림의 세 멤버이자 형제인 김창완, 김창훈, 김창익이 크레파스로 그림을 함께 그렸다. 셋은 대학생이었다. 기성세대와 달리 자유분방함을 강조하고 싶어 만든 기획이었다. “1집 녹음이 끝난 직후 큰 도화지를 샀다. 그러고는 서로 머리를 맞대 직접 그림을 그려”(김창훈) 나온 표지였다. 산울림은 12장의 정규 앨범과 동요 앨범의 표지로 모두 직접 그린 그림을 썼다. 주로 맏형인 김창완이 그렸다고 한다. 가수의 음악적 정체성과 표지 디자인을 일관된 동화 시리즈로 연결한 최초의 시도였다.
‘전문 디자이너’ 등장... 표지 실험 전성시대, 1990
1990년대엔 혁신적인 음반 표지가 쏟아졌다. 음반 판매 100만장 시대에 접어들며 음악 시장이 커지자 표지 제작도 외부 전문가의 손을 빌려 세련돼지기 시작했다.
“서태지와 아이들과 록밴드 넥스트의 앨범 표지가 실험의 선봉”(김작가ㆍ김상화 음악평론가)에 섰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유감’(1996)과 넥스트의 2집 ‘더 리턴 오브 넥스트 파트 1: 더 빙’(1994) 앨범 표지가 대표적이다. 두 음악인의 앨범 표지 제작은 주로 디자이너 전상일이 전담했다. ‘시대유감’ 앨범 표지는 시대 풍자의 정수를 보여준다. CD 앞표지엔 무지갯빛 원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CD 케이스 안엔 머리가 잘린 물고기가 그려져 있다. ‘시대유감’은 현실 부정적인 가사를 담고 있다는 이유로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의 제재를 받아 곡 공개 불가 판정을 받은 노래다.
“예술을 향한 서슬 퍼런 검열에 대한 부조리를 수면의 빛에 이끌려 이상향으로 가는 줄 알았지만, 그물에 잡혀 수산시장에 머리가 잘린 채 팔리고 있는 물고기에 비유”(전상일)해 표지가 제작됐다. 넥스트는 컴퓨터그래픽(CG)의 ‘불새’ 이미지를 표지에 싣고, 이를 밴드의 상징으로 썼다. 불새는 신해철의 날카로운 눈매에서 영감을 받아 전상일이 디자인했다고 한다. “불새의 눈엔 보는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문양을 넣어 시각의 다양성”을 강조했다.
“철조망에 걸린 고무신 표지 보자마자 얼굴 찡그려”
“록밴드 신중현과 엽전들은 동명 1집(1974)에 일러스트를 사용해 음반 표지의 변화를 처음 시도”(김성환 음악평론가)했다. 이들의 1집 표지엔 기타리스트 신중현을 비롯한 밴드 멤버들의 사진 위로 파란색 물결이 넘실거린다. “사이키델릭한 록 음악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신중현) 음반 제작사가 실험에 나섰다.
“히피 문화의 선구자였던 한대수는 앨범 표지로 예술적 자유로움을 보여줘”(서정민갑 음악평론가) 반향을 낳았다. 한대수의 2집 ‘고무신’(1975) 표지에 사람은 없다. 허름한 담벼락의 불그죽죽한 철조망에 엉킨 흰색 고무신은 고무가 베일 듯 위태롭다. 철조망은 분단된 한반도를 뜻한다. 흰색 고무신은 백의민족이자 가난했던 민중의 상징이다. 한대수는 “집 앞 철조망에서 녹물이 떨어지는데 유난히 하늘은 파랗던” 모습을 보고 이 콘셉트를 앨범 표지로 삼았다. 그는 서울 종로구 현 역사박물관 자리에 있는 집에서 당시 전세로 살며 직장을 다녔다. 유신시대에 나온 이 도발의 표지는 바로 정부의 눈에 찍혔다. “문화공보부에서 음반 심사를 하는데 표지를 보자마자 심사위원이 얼굴을 찡그리더라. 듣기도 전에 눈 밖에 난 거지. 바로 판매 불가 판정을 받았고, 하하하.”(한대수)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