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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아이들은 여백에서 자란다

입력
2019.02.14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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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늘 벗어나고 싶어 한다, 어떻게든 자기 시간과 공간을 찾아낸다. 부모들은 그런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못내 불안해한다. 아이들은 요즘 제대로 된 여백을 가지기 쉽지 않다. 수행평가에서부터 시험, 교내활동까지 한순간도 마음을 놓기 어렵다. 입시에서 제대로 평가받으려면 빈틈없이 칸을 메워야 한다. 취업도 마찬가지다.

“좀 놔 둬.” 아빠들은 잘 노는 아이가 더 잘 된다고 말한다. 입시 돌아가는 거 모르고 숙취 깨는 게 일상인 아빠들의 무관심과 무능은 엄마들의 성토 대상이다. 그게 다가 아니라고 항변하다가도 학종이니 선행이니 말 나오면 금세 입을 다문다. “학교는 가고 취업은 해야 사회생활도 하지. 이젠 아빠 경쟁력이라는데, 원.”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한 치 오차 없는 전략과 학습이 필요하다. ‘SKY캐슬’은 단순히 드라마가 아니다.

여백 채우기는 자신만의 시간을 관리하는 능력이다. 여백과 공백은 다르다. 여백은 방치의 자유시간이 아니다. 여백을 잘 채우려면 전체 틀과 기본 밑그림이 탄탄해야 한다. 그게 아니면 미완의 공백이 된다. 애들한테 시간을 줘봤자 열이면 열, 게임이나 휴대폰 삼매경이 뻔하다고 한다. 자신이 관리하는 시간을 가져보지 못한 채 숨막히는 일정에 짬이 나면 손쉽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여백이 아니라 공백을 채우고 있다.

여백은 불안하다. 꽉 짜인 일정이 답답해도 빈 공간이 없는 것이 오히려 마음 편하다. 창조는 어렵고, 귀찮고, 위험한 일이다. 그냥 주어진 거 시키는 대로 하면 보상이 주어지는 그런 삶이 편하고 좋다. 모두들 두리번거린다. 유능한 ‘코디 쓰앵님’ 어디 없냐고. 좋은 취업 학원 어디 없냐고. 새로운 도전은 그렇게 학원에서 시작된다.

남의 아이들은 여백에서 자라면 좋겠다. 누군 그게 좋은지 몰라서 이렇게 사냐, 아직 정신 못차렸구만 하고 혀를 차면서, 제발 너네 아이는 여백 철철 넘치는 데서 키워보라 한다. 내신 경쟁에서 알아서 밑을 깔아준다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다. 대신 내 아이한테는 얘기한다. 걔랑 어울려 다니지 말라고. 그런데, 혹시, 그 집엔 빌딩이라도 있나?

대학에 들어와도 여백 채우는 데는 서툴다. 학원처럼 잘 요약해서 전달해 주는 강의가 좋다. 새로운 걸 스스로 찾아서 하는 과제가 많은 강의에는 여지없이 교재대로 진행해 달라는 불평이 따른다. 입시와 취업을 위해 한순간도 실수가 용납되지 않던 판을 거친 젊은이들에게, 창업을 하라고 등을 떠미는 것은 공백 상태의 사지로 내모는 것과 같다.

훌륭한 교육철학과 공정한 사회윤리가 교육제도에 끊임없이 합쳐져 왔다. 자기주도 학습과 전공탐색 같은 개념은 모두 도입돼 있다. 하지만 입시와 취업 전쟁에서 숭고한 교육 이념이 들어올 때마다 왜곡된 형태의 작은 괴물이 하나씩 생기고, 그걸 다루는 건 학원 몫이 된다. 이념과 가치는 아름다운데, 비치는 모습은 추하고, 결과물은 빈약해진다. 아이들은 숨 막히지만 금세 적응한다. 학교가 숨을 쉬어야 아이들도 숨쉬고, 사회가 숨쉬어야 부모들도 숨을 쉰다. 대학과 기업에 선발 자율권을 더 주든지, 교육기관 다양성을 늘려야 한다.

여백은 경쟁력이다. 정형화된 틀에서는 글로벌 경쟁에서 주도권을 가질 인재를 키워내기 어렵다. 능력과 여력이 있는 아이들과 부모들은 이미 한국 교육과정을 떠나고 있고, 여백을 채우는 능력은 사치스러운 전유물이 되어간다. 좀 놔둬도 되는 아이들이 진정 자기 주도의 인생을 살 수 있다. 우리 아이의 여백은 어떤 모습일까,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부모들의 사치스러운 고민일 수 있다. 폰질과 게임하는 모습에 바로 등짝 스매싱이 날아간다. 하지만 아직 신선한 아이디어와 꿈을 가진 아이들은 자기 시간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여백을 쥐여줘야 한다.

이재승 고려대 장 모네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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