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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삐딱한 글씨체’ 이유로 내쳐진 다산, 천주교도 색출 임무를 맡다

입력
2019.02.14 04:40
수정
2019.05.23 13:44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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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다산, 금정찰방으로 좌천되다

정조는 여론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겠다는 포석으로 기습적인 선제 조처를 내렸다. 다산을 금정찰방으로 좌천시키는 표면적 죄목은 ‘삐딱한 글씨체’였다. 다산은 임금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그날로 한강을 건넜다.그림은 '대동여지도' 중 다산이 좌천된 금정 지역이 표시된 부분. 진선출판사 제공
정조는 여론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겠다는 포석으로 기습적인 선제 조처를 내렸다. 다산을 금정찰방으로 좌천시키는 표면적 죄목은 ‘삐딱한 글씨체’였다. 다산은 임금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그날로 한강을 건넜다.그림은 '대동여지도' 중 다산이 좌천된 금정 지역이 표시된 부분. 진선출판사 제공

이가환의 해명 상소

채제공이 글을 올린 이튿날인 1795년 7월 9일, 공조판서 이가환이 박장설의 상소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힌 상소문을 올렸다. 사전에 채제공과 합을 맞춘 행동이었다. 이가환은 박장설이 자신을 천지간에 둘도 없는 패륜아요 추물로 지목한 이상 가만있을 수 없어 글을 올린다며 포문을 열었다.

그들의 무고는 너무 터무니가 없다면서, 이승훈에게 책을 사오게 했다는 비난과, 1785년에 변명하는 글을 지었다는 지적, 청몽기설(淸蒙氣說)과 사행설에 대한 비판을 차례로 공박했다. 이중 청몽기설을 향한 비판에 대해 “청몽기의 주장은 진(晉)나라 때 저작랑(著作郞) 속석(束晢)에게서 나온 것으로 역대에서 모두 여기에 근거를 두었습니다. 설사 그 말이 서양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역상(曆象)의 방법은 사학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하물며 옛 사람이 이미 말한 것이겠습니까. 그가 옛 글을 공부하지 않은 것을 애석하게 생각합니다”라고 적극적으로 방어했다.

‘다산시문집’에 실린 다산이 이가환에게 보낸 편지 ‘답소릉(答少陵)’ 중에 “몽기에 대한 주장은 어찌 다만 속석 뿐이겠습니까? ‘한서(漢書)’의 ‘경방전(京房傳)’에도 나옵니다. 어째서 이것은 근거로 대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모두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습니다”라는 대목이 보인다. 당시 두 사람은 사태를 예의주시하면서 서로 필요한 정보를 긴밀하게 공유하고 있었다.

책문을 출제해서 정약전이 사행설을 주장했음에도 장원으로 선발했다는 비방도 반박했다. 당시 자신은 참시관(參試官)으로 참관했을 뿐 책문을 낼 위치에 있지도 않았고, 장원 선발 또한 시관의 전체 의견이 일치될 때만 가능한 것인데, 이렇듯이 허술한 논리로 자신을 무고하는 저의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이가환은 글 끝에 사직과 대죄(待罪)를 청했다. 임금은 사직하지 말고 맡은 일을 그대로 보라는 전교를 내렸다.

사학 금지 공문과 성균관 유생의 상소

이틀 뒤인 7월 11일에 한성부에서는 전국에 사학을 금지하는 공문을 내려 보냈다. 전국에 한글과 한문으로 된 사학 금지 관문(關文)이 일제히 내걸렸다. 다만 이를 틈타 사사로운 원한을 풀려고 남을 무고하거나, 뇌물이나 연줄로 무고한 백성을 망측한 죄에 빠뜨리는 경우는 엄히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어쨌거나 이 일로 천주학을 금지하는 선언이 처음으로 전국에 공표되었다.

이후 이가환의 처벌에 대한 논의는 한 두 차례 더 글이 오간 뒤로 수그러드는 기미를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7월 24일에 성균관 유생 박영원(朴盈源) 등이 이가환을 배척하는 상소를 다시 올려 꺼져 가던 불씨를 살렸다. 그 글 속에 “올해에 최인길 등 3적(賊)의 변이 또 나왔습니다. 다만 옥사를 처리한 문건이 몹시 비밀스러워 자세한 내막이 어떠한지는 알지 못하나, 법망은 너무 넓고 국법은 지나치게 관대해서 요사한 자를 죽임은 단시 세 사람에 미쳤고, 교활한 괴수는 여태도 무리들의 우두머리 자리를 보전하고 있고, 천한 자들만 형벌로 죽임을 당했습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최인길과 윤유일, 지황 등 세 사람의 죽음이 천주교와 관련 있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자세한 내막은 전혀 모르고 있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이가환과 정약전, 정약용 형제의 처벌을 요구했다.

같은 날 성균관 동재(東齋)의 유생 이중경(李重庚) 등 30여명의 상소가 다시 올라왔다. 이들은 뜻밖에도 박영원 등이 이가환과 정약용 등을 저격한 상소가 자신들의 의사를 묻지 않고 멋대로 올린 것이라며, 글 속에 남을 모함한 내용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동재를 다 비우고 나가 별도의 상소를 올린다고 썼다. 천주학에 대한 반대 입장은 같았으나, 이가환과 정약용 형제에 대한 입장은 달랐다. 정조는 박영원 등이 절차와 관례를 무시한 채 멋대로 글을 올려 기강을 무너뜨린 것을 크게 나무란 뒤 법률에 따라 의법 조치할 것을 명했다.

이를 두고 ‘벽위편’에서는 이중경 등의 상소를 남인의 신서파들이 앙갚음하는 습속을 꺼려 자기들만이라도 면해보려 한 수작이라고 폄하했고, 이가환이 이후 보답으로 이중경에게 돈을 보내 생활비를 대주었다고도 했다.

삼흉(三凶)의 좌천과 유배

이가환은 임금의 당부에도 계속 물러날 것을 청하며 출근하지 않았다. 7월 25일에 정조는 이가환을 충주목사로 제수하는 한편, 전날 상소를 올렸던 박영원에게는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했다.

그러자 같은 날 수찬 최헌중(崔獻重)이 척사의 뜻으로 다시 긴 상소문을 올렸다. 그의 논조는 과격하고 또 단호했다. 그는 먼저 서학의 위험에 대해 길게 논의했다. 이어 어째서 이 같은 사설(邪說)을 멋대로 굴도록 놓아두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 근본 원인을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에 힘쓰는 호신무기(好新務奇)로 꼽고, 급기야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래에서는 더 좋아하게 마련이다”라고 한 주자의 말을 인용한 뒤, 임금의 푯대가 바르지 않아 이를 보고 그림자가 그대로 따르게 된 경우가 아니냐고 했다. 임금의 잘못된 태도를 나무라며 반성을 촉구하기에 이르러, 서학의 배후로 임금을 지적하는 듯한 과격한 논조였다.

정조는 짐짓 훌륭한 말이라 칭찬하고, 최헌중을 사간원의 대사간에 임명하였다. 한쪽을 지긋이 누르면서 다른 한쪽을 슬쩍 들어주는 정조의 용인술이 잘 드러난 장면이었다. 이튿날 7월 26일에 정조는 이가환을 불러 전후 해명을 한 차례 더 들은 뒤, 즉시 충주로 떠날 것을 명했다. 이승훈도 예산으로 유배 형에 처해졌다.

같은 날 정조는 중희당(重熙堂)에 나가 긴 글로 명을 써서 내렸다. 글 속에 다산에 대한 처분이 들어 있었다. 그 대목은 이렇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사안은 정약용의 일이다. 그가 만약 눈으로 성인을 비난하는 책을 본 적이 없고, 귀로 경전에 어긋나는 주장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면, 죄 없는 그의 형이 어찌 상소에 이름이 올랐겠는가? 그가 문장을 하려 했다면 육경과 양한(兩漢)의 좋은 바탕이 있거늘 어찌 굳이 기이함에 힘쓰고 새로움을 구하여 몸과 이름이 낭패를 본 뒤에야 그만 두기에 이른단 말인가. 이 무슨 취미이고 욕심인가. 종적이 따로 탄로 난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이 같은 비방을 받은 것이 바로 그의 죄목이다.”

정약전이 박장설에게 비방을 받은 것도 정약용의 탓이다. 읽으라는 성현의 글은 안 읽고, 신기함만 추구한 결과가 이렇게 나타났다. 종적이 탄로 나지 않았어도, 비방을 자초한 것이 바로 그의 죄다. 묘한 논법이다. 어디에도 다산이 천주교를 믿었다는 표현은 없고, 신기함을 추구하다 보니 이 같은 비방을 불렀다고만 했다.

여기에 더해 정조는 다산이 자신의 분부를 어기고 삐딱하게 기울어진 글씨체를 여전히 고치지 않고 있으므로, 이 죄를 물어 금정찰방으로 제수한다고 선언했다. 결국 표면적인 좌천 명목은 삐딱한 글씨체였다. 죄 아닌 이유로 억지 죄를 물었으니, 하도 말이 많아 일단 다산을 내친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조는 서슬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무슨 낯으로 조정에 하직인사를 하겠느냐며, 이 길로 당장 떠나 한강을 건널 것을 명했다. 기습적인 선제 조처였다. 다산을 포함해 이가환, 이승훈 등을 중앙 정계와 떼어놓음으로써 여론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겠다는 포석이었다.

다산은 자신이 주문모를 구해준 사실이 탄로 날까 봐 전전긍긍하던 차였으므로, 임금의 조처에 토를 달지 않고 그날로 한강을 건넜다. 화성 건설이 막바지에 달하고 있던 참에 화성 설계의 주역이었던 다산이 이렇게 다시 임금 곁을 떠났다. 이로써 공서파들이 입만 열면 저격 대상으로 삼았던 천주교 삼흉이 모두 도성을 떠났다.

다산이 금정찰방으로 쫓겨난 1795년, 5달간의 일을 적은 일기인 ‘금정일록’의 첫면. 다산은 ‘금정일록’을 비롯해 다수의 일기를 남겼다. 다산에게 일기쓰기는 정치적인 행위였다. 정민 교수 제공
다산이 금정찰방으로 쫓겨난 1795년, 5달간의 일을 적은 일기인 ‘금정일록’의 첫면. 다산은 ‘금정일록’을 비롯해 다수의 일기를 남겼다. 다산에게 일기쓰기는 정치적인 행위였다. 정민 교수 제공

다산의 정치적 일기장

다산은 금정찰방으로 쫓겨난 1795년 7월 26일부터 그 해 12월 25일 내직에 보임되어 돌아올 때까지의 일을 별도의 일기에 담아두었다. ‘금정일록(金井日錄)’이 그것이다. 1974년 김영호 선생이 펴낸 ‘여유당전서보유’에 실려 있다. 다산은 이밖에도 중요한 고비마다 ‘죽란일기(竹欄日記)’, ‘규영일기(奎瀛日記)’, ‘함주일록(含珠日錄)’ 등의 기록을 별도로 남겼다.

다산은 이 4종 외에 몇 가지 일기를 더 남겼으나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다산에게 이 같은 일기 쓰기는 다분히 정치적인 행위였다. 동선에 따른 정황과 만난 사람과의 대화, 서로 오간 문서를 기록으로 남기면서 동시에 자신의 알리바이를 남기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다산은 이렇게 5개월간의 금정 시절을 시작했다. 그는 7월 27일 수원을 거쳐 진위(振威)에서 묵었다. 수원유수 조심태(趙心泰)를 만났을 때 조심태가 말했다. “홍산(鴻山)과 성주산(聖住山), 청양(靑陽) 경계의 깊은 골짝과 높은 고개에는 띳집을 엮고 몰래 숨어 있는 자가 많다고 합디다. 영공은 잘 살피시오.” 깊은 산속에 숨어사는 천주교 신자를 잘 검속해서 잡으라는 뜻이었다. 포도대장과 어영대장을 지냈고, 정조의 심복이었던 조심태의 이 같은 조언은 당시 정조가 다산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 넌지시 짚어준 대목이기도 했다. 28일에는 평택과 아산을 거쳐 갈원(葛院)에서 예산으로 귀양 가던 자형 이승훈과 만나 함께 잤다. 두 사람은 이때 밤새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그것도 궁금하다.

다산은 서울을 떠난 지 사흘 만인 7월 29일 저녁, 금정에 도착했다. 도착 즉시 다산은 충청도 관찰사 유강(柳焵)에게 도착 보고를 올렸다. 그 글에서 다산은 ‘즙민지방(戢民之方)’, 즉 천주교도를 붙잡아 들일 방법에 대해 의논했다. 조심태의 말에서도 보듯, 정조는 다산에게 천주교가 유난히 극성을 떠는 금정으로 내려가, 그곳의 천주교도들을 색출하여 감화시킬 것을 명했다.

한편 이 지역은 남인 공서파의 한축을 이루는 성호 우파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인근에는 좌상 채제공의 일족들이 살고 있었다. 성호 이익의 종손(從孫)인 이삼환(李森煥, 1729-1814)은 이 지역의 원로로 중심을 잡고 있었고, 그는 1786년 ‘양학변(洋學辨)’을 지어 천주교에 극력 반대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드러내 말하지는 않았지만, 다산을 이곳으로 내려 보낸 정조와 채제공의 속셈은 이곳에서 천주교도 검거에 공을 세우고, 공서파 남인들을 우호적 세력으로 만들어 자신에게 씌워진 천주교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 버리고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다산도 누구보다 분명하게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금정은 다산이 전향 선언과 환골탈태의 탈바꿈을 준비하는 공간이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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