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직 대신 ‘프리터족’을 택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일본에서 등장한 용어인 프리터족이란 직업없이 자유(free)롭게 살며 아르바이트(arbeit)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뜻한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 거품 경제가 꺼진 뒤 장기 불황이 지속되면서 등장한 이들을 ‘후리타’라고 부른다.
지난해 취업 포털 알바몬 조사에 따르면 아르바이트생 6,924명 중 스스로 프리터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28.6%였다. 프리터족의 60.3%는 프리터족 생활에 만족한다고 응답했다. 과연 무엇이 이들을 프리터족으로 머물게 하는지 8개월 째 프리터족으로 생활하는 채지연(26)씨를 만났다.
◇ 삶 전체를 축소시키다
“제 한 몸을 건사하는 것 외에 불필요한 욕심을 내지 않기로 했어요.”
충청북도 청주에 사는 채씨는 자칭 행복한 프리터족이다. 현재 청주의 한 커피 전문점에서 주말이면 토, 일요일 아르바이트를 한다. 카페 사정에 따라 정오나 오후 4시부터 6시간씩 일한다. 가끔 다른 공휴일이나 평일에 대체 인력이 필요할 때도 출근한다. 애초에 필요한 한 달 생활비를 미리 계산해두고 여기 맞는 일을 찾았다. 그렇게 해서 버는 돈은 월 50만원.
한 달 생활비로 부족할 듯 싶은데 채씨는 거뜬히 살아간다. “월세와 관리비를 합해 22만 원을 내고 휴대폰비와 교통비로 10만 원 가량 써요. 나머지는 식비로 나가죠.”
대신 화장이나 장신구 구입 등 일체 꾸밈 활동을 하지 않는다. 옷도 계절별로 1,2벌 뿐이다. 더러 외식하고 싶으면 음식을 사먹지만 대부분 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하루 한 두 끼만 먹는다. 한 끼 식사량은 현미 한 줌, 귤 8개. 남자친구의 영향으로 채식주의자가 된 그는 육식 뿐 아니라 불을 사용한 조리를 아예 하지 않으며 양념도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현미도 생쌀을 씹어 먹는다. 요리를 하지 않으니 전자레인지, 냉장고, 가스레인지도 필요 없다.
그렇다보니 가구와 전자제품이 거의 없어서 마치 빈 집처럼 보인다. 낮은 탁자에 다리 없는 의자, 그 위에 대학 때부터 쓰던 노트북이 전부다. 텅 빈 책장은 곧 버릴 예정. 옷장에는 이불 두 채와 외투 세 벌 뿐이다.
◇ “지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2년의 방황 끝에 프리터족 선택
채씨가 처음부터 수도자 같은 삶을 산 것은 아니다. 프리터족이 되기까지 2년의 고통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도 취직해 돈을 버는 평범한 삶이 목표였다.
법 공부에 흥미가 있었던 채씨는 2016년 청주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뒤 관련 공무원을 1년간 준비했다. 그러나 공무원 시험에 떨어진 뒤 법률사무소에 취직했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갖 다툼이 벌어지는 서류를 매일 보는 게 스트레스였어요. 그래서 매일 퇴근 후 술을 마셨죠.”
결국 몸도 마음도 지쳐 3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퇴직 후 다시 좋아하는 일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싶었지만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해서 그럴 여유가 없었다. 2,000만 원이 넘는 학자금 대출빚을 갚기 위해 대학 때부터 학원, 예식장, 뷔페 식당, 공장 등 주로 높은 시급을 주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채씨는 졸업 후에도 남은 빚을 청산하기 위해 분주한 2년을 보냈다. 돈을 벌면서도 적성을찾으려고 배울 수 있는 일을 골랐다. 주중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는 빵 집에서 제빵 기술을 배우는 댓가로 월 130만 원을 받았다. 부족한 벌이를 보충하려고 주말에도 도시락 집에서 도시락 만드는 일을 했다. 2년간 일주일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마침내 빚을 갚고 나니 어느 순간 ‘현타’가 왔어요” 현타란 요즘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현실 자각 타임의 줄임말.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는 순간을 뜻한다. “지구에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불안하고 외로웠죠.” 그에게 지난 2년간의 삶은 지옥 같았다. “한 우물을 파야 성공한다는데 그럼 난 지금껏 우물을 파지 않은 건가? 그러면 나는 이 세상에서 쓸모 없는 인간일까요?”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던 채씨는 어느 날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기이한 꿈을 꾸었다. “그날 문득 많은 사람들이 죽을 만큼 힘들다면서도 왜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가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삶을 고민했죠.” 스스로 최소한의 물질로만 살아가는 프리터족이 되기로 결심했다.
◇ 본의 아닌 무소유의 삶
채 씨는 프리터족이 되고 나서 자연스럽게 미니멀 리스트가 됐다. 미니멀 리스트란 소유를 최소화하는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일상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만으로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만큼 채 씨의 삶은 자유롭고 단순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족욕과 일기쓰기로 하루를 시작한다. 규정된 일과는 없지만 오전 9시쯤 집을 나서서 근처 서점이나 도서관에 간다. 머물고 싶을 때까지 앉아서 좋아하는 책을 읽는다. 요가를 배우며 관심이 생긴 대체의학 관련 서적을 주로 읽는다. 삶을 성찰하는 니체 등의 철학서와 심리서도 챙겨보는 편이다. 점심때 집에 돌아와 유튜브로 동물, 운동 등 좋아하는 영상을 보고 요가를 한다.
점심식사는 시간 사용이 자유롭다 보니 따로 시간을 정해놓지 않고 배고플 때 먹는다. 오후가 되면 산책 등 가벼운 운동을 한다. 가끔씩 직장을 다니는 남자친구를 만나 비용을 최대한 아끼는 소박한 연애도 한다. 주로 시내 하천을 걸으며 하루 종일 대화하는 편이다. 두 사람 다 건강에 관심이 많아 서로의 집을 오가며 요가 등의 실내운동을 한다. 돈을 쓰는 것은 식사와 차 마시는 정도다. 극장에서 영화를 본 지도 2년이 넘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말에는 오후에 버스를 타고 집에서 50분 정도 떨어진 카페로 출근한다. 현재 사는 원룸으로 이사 오기 전에 구한 아르바이트인데 직원들과 성격이 잘 맞아 조금 멀어도 그 곳으로 간다. 카페 주말아르바이트는 일이 힘들지 않고 비교적 쾌적한 공간에서 일할 수 있어서 마음에 든다.
아르바이트가 늦게 끝나면 오후 10시쯤 귀가한다. 집에 돌아오면 명상으로 하루를 마무리 한다. 저녁은 먹지 않을 때도 있고 정 배가 고프면 가벼운 면류를 사먹는다.
◇ “마음을 바꾸는 것은 단 1초밖에 걸리지 않는데 그게 어렵죠.”
언뜻보면 단조로운 삶이지만 채씨는 프리터족을 통해 무엇보다 건강을 얻었다. 직장을 다니던 시절 반복되는 업무 스트레스와 음주로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잃었던 건강을 회복했다. “남과 비교해 스스로 열등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반드시 목표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니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요.”
그는 “물질에 대한 욕심을 조금만 버려도 지구가 놀이터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저 매 순간에 감사하며 구애 받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건강하게 오래 할 수 있는 삶. 그가 프리터족이 된 이유 중 하나다.
대신 인간 관계도 간소해 졌다. 모이면 명품 얘기만 하던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채 씨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친척들도 불편해 집안 행사에 잘 참석하지 않는다. 초반 부모님과 갈등도 심했다. 부모님은 “노후 생각은 하지 않느냐, 직장 다니는 애들이 너를 보면 아마 욕할 것” 이라는 말까지 했다. 물론 부모님은 여전히 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과거보다 존중해주는 편이다. “부모님이 가끔 문자를 보내세요. 지금 명상 중이냐고 조심스레 묻죠.”
남들에게는 불안해 보이는 삶이지만 채 씨는 스스로 당당하고 행복하다. 언제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됐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제약이 없잖아요. 원하는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고, 그런 마음을 만들어 나가는 게 재미있어요.”
채 씨에게는 현재가 중요하다. 그렇다고 장래 계획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건강에 관심이 많아 지금 좋아하는 요가를 더 깊게 배워 강사가 될 생각이다. 하지만 그는 어느 곳에 소속돼 월급을 받는 요가 강사가 돼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언제든 다시 프리터족으로 돌아올 생각이다. “하는 일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어떤 욕심이 생기면 더 이상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거든요.”
전근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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