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후면 정월 대보름이다. 1년에 두 차례 있는 달이 주인공인 날이다. 달은 해와 달리 바라볼 수 있어 다채롭게 상상됐던 듯싶다. 해는 밝을수록 자신을 더 못 보게 하지만 달은 밝을수록 자기를 한층 선명하게 보여준다. 덕분에 사람들은 계수나무니 옥토끼니 절구질이니 하며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다채롭게 빚어낼 수 있었다.

그러한 달을 우리나라에서는 달나라로 부르기도 한다. 훨씬 밝고 오래 접하는 해를 ‘해나라’라고 부른다든지, 용왕이 다스리는 바다 속을 ‘용궁나라’라고 한다든지, 또 사후세계를 ‘저승나라’라고 하면 엄청 낯설어진다. 반면에 달에는 나라가 붙어도 그저 자연스러울뿐 어색하지 않다. 나라는 사람들이 이승에서 일구고 사는 터전의 하나임에도 말이다. 그만큼 달은 우리네 사람들과 친숙했음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달에 나라를 붙이지 않고 세계를 뜻하는 ‘계(界)’를 붙인다. 가령 쥘 베른의 ‘Autour de la lune’(1869년)를 우리는 ‘달나라 탐험’이라 번역한 데 비해 중국에서는 ‘월계여행(月界旅行)’ 식으로 번역한다. 그렇다고 중국인이 달을 우리처럼 친숙하게 여기지 않았음도 아니다. 전설이나 설화, 시문 등을 보면 중국인과 한국인의 달에 대한 감각이나 상상은 유사했다. 그저 우리가 나라를 붙이는 대상에 저들은 세계라는 표현을 붙였을 따름이다.

이런 차이는 왜 생겨난 것일까. 달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나 심상 등엔 별 차이가 없음에도 우리는 나라를, 중국은 세계를 붙인 연유가 무엇일까. 정답이 있다고 생각되어 던진 물음은 아니다. 다만 중국인은 적어도 3,000여 년 전부터 자신들이 모여 사는 곳을 세계라고 설정했는데, 이러한 전통과 연관이 있는 듯싶다.

당시 그들은 ‘하늘의 아들’, 곧 천자가 다스리는 강역을 천하라 불렀다. 이 ‘하늘 아래 모든 곳’이란 뜻의 천하는 오늘날의 세계(world)와 거의 같은 개념이다. 이는 지금의 세계가 나라들로 이뤄졌듯이 천하 또한 나라들로 이뤄져 있다고 본 점에서도 확인된다. 중국이란 표현도 그 증거의 하나다. 중국은 ‘나라들의 중심’ 또는 ‘중심이 되는 나라’란 뜻으로, 여기에는 천하는 나라들로 이뤄졌다는 관념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중심이 되는 나라도 나라이지 않은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왕’과 ‘왕 중의 왕’은 똑같이 왕이라 불려도 위상은 천지 차이다. 왕 중의 왕은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의 왕으로 모시는, 그렇기에 모든 나라의 왕들을 신하로 부리는 왕이다. 천자가 바로 그러한 왕 중의 왕이었다. 따라서 천자가 다스리는 영역은 뭇 나라들 전체가 되고 이것이 바로 천하, 지금으로 치자면 세계였다.

중국은 역대로 스스로를 이러한 천자의 나라라고 여겨왔다. 자기 위상을 나라급으로 치지 않고 천하, 곧 세계급으로 메겼다. 그렇다보니 근대에 들어 자기보다 우월한 서구문명과 조우했을 때도 ‘중서(中西)’ 같은 표현을 당연하다는 듯이 썼다. 서양이 ‘오랑캐’가 아니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문명세계라면, 세계급인 중국만이 그와 대등하다고 보아 ‘중국과 서양’이라 병칭했고, 그 준말로 ‘중서’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동양과 서양’이란 뜻을 표할 때 우리는 ‘동서’라고 하지만 지금도 중국은 여전히 ‘중서’라고 쓰는 이유다.

하여 우리는 ‘한국⊂아시아⊂세계’를 당연하다 여기지만, 중국인들은 아시아란 틀에는 중국을 다 넣을 수 없다고 여긴다. 중국인들의 문화적 DNA에는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 식이 아니라 ‘우리 세계와 다른 세계’ 식의 인식구조가 기본값으로 각인되어 있음이다. “중국은 그러한 식으로 세계를 사유했는데, 우리는 왜 나라를 기본단위로 세계를 사유했는가?” 같은 물음을 던지려 함이 아니다. 세계를 사유의 기본단위로 삼음이 나라를 그렇게 삼음보다 항상 또는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기에 그러하다.

그럼에도 우리와 중국을 비교한 까닭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기본값이 변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 기업이 ‘5G’, 그러니까 5세대 이동통신기술을 기반으로 새로운 제품을 개발할 때는 아예 출발 선상부터 5G 관련 국제표준을 염두에 둔다. 이는 우리도 국가 차원부터 기업, 개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일상의 기본단위로 삼아야 하는 때가 시작됐음을 시사해준다. 드라마나 영화를 제작할 때, 또 아이돌 그룹을 기획할 때 세계 시장을 염두에 둔 지가 이미 꽤 되었지 않은가.

비단 경제나 문화 차원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이란 시대적 사명을 실현함에도 이런 사유의 전환이 꼭 필요하다. 남한과 북한이 함께 일구어 갈 미래를 나라 차원이 아닌 세계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항구적 평화체제의 구축이라는 시대적 소명의 실현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흡수 통일이나 연방제 같은 나라 차원에서의 미래 구상이 아니라, 남북한이 ‘따로 또 같이’ 병존하되 하나의 세계를 이루며 공영하는 그러한 접근이 말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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