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위한 법’ 사유화한 사법 권력
적폐 타령 멈추고 ‘사법개혁’ 나서야
民이 통제하는 법원시스템 구축 관건
대한민국은 유독 법이 우월적 지위를 보장받아 온 나라다. 권력 구조만 봐도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 핵심 요직을 율사 출신이 장악하고 있다. 20대 국회의원 300명 중 법조인 출신은 50명. 다른 직역 종사자보다 수십 배나 많다. 제1 야당인 자유한국당 대표 경선에서 3강 구도를 형성한 황교안 전 총리, 홍준표 전 대표, 오세훈 전 서울시장도 모두 율사 출신이다. 집권 여당 대선 주자로 꼽히는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경기지사도 마찬가지다. 견제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 헌법이 독립적 지위를 보장한 사법 권력이 든든한 뒷배다.
법학은 사회 병리를 치유하는 학문이다. 분쟁이 생기면 옳고 그름을 따져 법의 권위로 정의로운 심판을 내린다. 의학이 인간 질병을 치유하는 의사를 양성하듯, 법학은 ‘사회 의사’인 법률가를 양성한다. 법률가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전문지식을 쌓은 최고 엘리트다. 그렇다면 이들이 다스리는 대한민국은 공정하고 깨끗한가. 법은 만인에게 평등한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국민은 많지 않을 성싶다.
권력자는 누구나 법에 의한 지배를 강조한다. 민주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근간은 법치주의라는 신념을 퍼뜨린다. 그러면서 법치주의를 앞장서 훼손한다. 법은 늘 권력 편이니. 법치의 전제는 국민적 동의와 승복이다. 플라톤은 “참된 법률의 지배는 자의로 복종하는 자를 지배하는 것이지 강제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법이 권력자의 통치 도구요,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상황에서 법치주의는 아득한 이상향일 뿐이다.
한국 사회에는 사법부에 대한 비판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있다. 재판 독립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 탓이다. 사법부가 일제와 군사독재 시절 국민을 억압하는 통치 도구로 동원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상식으로 만들며 권력과 한몸이 돼 온갖 특권을 누렸다. 사법부는 민주화를 거친 뒤에야 정치 권력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힘없는 서민들과 고위공직자 재벌 등 특권층에 대한 잣대가 다르다는 일각의 비판에도, 법관 대다수는 법률과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하리라는 믿음이 점차 뿌리를 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정치 권력이 떠난 자리에 국민을 위한 사법부는 없었다.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한 소수 엘리트가 폐쇄적 관료조직의 비호 아래 법을 사유화하며 정치 권력과 재판 거래를 일삼아 온 사실이 드러났다. 사법 농단에 연루된 법관만 100여명이다. 법이라는 강제력이 독립적으로 기능하리라는 믿음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사법 농단의 수장이 구속됐으니 이제 공정한 판결을 기대할 수 있는 걸까.
헌법이 법관의 독립을 보장한 뜻은 분명하다. 국회와 정부 간섭 없이 분쟁을 공정하게 해결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법 엘리트들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숨어 국민이 알아듣기 힘든 고상한 판결문으로 법 해석을 독점해왔다. 그들은 권력자와 재벌의 수호신이었고 준법은 늘 서민들 몫이었다. 그러니 서민은 기회만 되면 법을 어기려 하고 권력자는 더 엄격한 법 적용을 외치는 악순환이 빚어질 수밖에. 국민 다수의 의지 및 시대정신과 동떨어진 법적 판단은 정당성을 얻기 어렵다. 권력이 법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의 침묵을 강요할 때 주권자의 뜻을 담은 ‘법대로’의 칼을 제대로 휘둘러야 한다.
그렇다고 집권 여당이 ‘적폐 판사의 저항’ 운운하며 사법 불신을 부추기는 건 또 다른 사법농단이다. 문재인 정부와 여당은 집권 3년차를 맞도록 촛불 국민의 염원을 실현한 게 거의 없다. 사법 농단을 막으려면 제왕적 대법원장의 권한을 분산하고 국민의 사법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 여당도 벌써 세 번째 집권이다. 적폐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 언제까지 적폐 타령, 전 정권 타령만 할 텐가. 사법에 대한 마녀사냥을 멈추고 법의 지배가 회복되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매진해야 한다. 소수 엘리트가 70년간 독점해 온 사법 권력을 국민 손에 돌려주지 않는 한 재판 독립에 대한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고재학 논설위원 겸 지방자치연구소장 goind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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