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을 기리는 센터의 메인 홀. NYT 캡쳐

위대한 소비에트 연방을 무너뜨린 원흉으로 지탄받던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러시아 관영 언론은 연일 옐친 전 대통령의 무능함을 비판하지만, 그를 기리는 기념관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장기 집권에 염증을 느낀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10일(현지시간) “3년전 개관한 옐친 대통령 센터의 관람객이 벌써 70만명을 넘어섰다”며 “국민을 속박하는 푸틴과 정반대인 그의 이미지가 어필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센터는 옐친의 고향이자 1918년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처형당한 중부 도시 예카테린부르크에 위치해 있다.

옐친 전 대통령은 소련이 붕괴된 1991년 집권해 1999년 물러났다. 당시 군부 강경파에 맞서 탱크 위에 올라가 투쟁을 선동하던 그의 강렬한 이미지에 대중은 열광했다. 서구에서 옐친은 다소 흠이 많지만 냉전 해체에 앞장선 용감한 영웅으로 각인돼 있다. 러시아에서 민주적 선거를 통해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하지만 옐친이 후계자로 일찌감치 지목한 푸틴 집권 이후 옐친은 ‘잃어버린 90년대’의 주범으로 낙인 찍혔다. 러시아인들에게 옐친이 대통령을 지낸 90년대는 혼돈과 범죄, 가난이 만연한 잊고 싶은 과거일 뿐이다. 민족주의자들은 ‘보드카에 찌든 어릿광대’라며 옐친을 조롱했고, 관영 매체들은 옐친을 비판하는 프로그램을 내보내는데 혈안이 됐다. 젊은이들은 옐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젊고 활기 넘치는 푸틴과 대조적인 옐친의 이미지에 현혹돼 비판에 가세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이 직접 옐친 대통령을 비판한 적은 없지만, 여론이 일제히 호응하면서 러시아 전체가 그를 매도하는 분위기로 흘렀다.

그러나 최근 상황이 반전됐다. ‘옐친 때리기’가 너무 지나쳤던 탓일까. 끝을 알 수 없는 푸틴의 장기 집권과 맞물려 러시아인들은 전임자인 옐친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의 생을 고스란히 담은 기념관 건립이 기폭제가 됐다. 각종 TV 프로그램을 통해 익숙해진 옐친의 무능과 나약함은 변화를 갈망하는 생동감의 대명사로 바뀌었다. ‘나를 따르라’고 외치는 푸틴과 달리 ‘러시아를 돌보라’고 강조했던 옐친의 리더십에 서서히 젖어 들었다. 여전히 많은 러시아인들이 옐친을 비판하면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기념관으로 모여들었다. 근처에 있는 다른 기념관에서는 푸틴과 러시아의 위대한 역사를 홍보하고 있지만, 학생들의 단체 견학을 제외하면 파리만 날리는 형편이다. 알렉산더 드로즈도프 센터장은 “소련은 옐친이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각 공화국이 자율적 협약을 통해 독립한 것”이라며 “90년대에 어떤 사건들이 발생했는지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광수 기자 rollings@hankookilbo.com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