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누구도 아닌 ‘정우성’으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25년간 최정상을 지킨 특급 배우, 연예인도 선망하는 ‘연예인의 연예인’, 영원불멸한 청춘의 아이콘, 그리고 소신 행보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티스트.
저마다 다른 의미로 정우성(46)을 떠올리고 간직하겠지만, 이 모두를 관통하는 단어는 ‘의지’와 ‘노력’이다. 톱배우 또는 톱스타라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그 이름을 바르게 쓰고자 노력하는 사람 정우성. 후배 영화인의 감독 데뷔를 위해 제작자로 나서고(‘나를 잊지 말아요’)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힘을 보태며(‘그날, 바다’ 내레이션) 바쁜 시간을 쪼개 전 세계 난민 캠프를 누빈다. 굳은 의지와 헌신에 가까운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그 일들을 그는 기꺼이 한다.
그런 정우성에게 이 질문은 온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좋은 사람인가요?” 영화 ‘증인’(13일 개봉)이 극중 인물의 대사를 빌려 조심스럽게 던진 물음표를 그에게도 건넸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사람, 이 정도가 맞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영화 속 캐릭터와 저 자신이 닮았다고도 느낍니다.”
‘증인’에서 정우성은 민변에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다 대형 법무법인에 들어간 변호사 순호를 연기한다. 살인 용의자를 변호하게 된 순호가 사건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인 자폐 스펙트럼 장애 고등학생 지우(김향기)를 만나 교감하는 이야기다. 지우를 증인으로 법정에 세워 의뢰인의 무죄를 입증하려 했던 순호는 편견 없이 순수한 지우를 통해 현실과 타협한 자신을 돌아보고, 지우는 순호와 가까워지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소박한 이야기지만 관계를 들여다보는 시선이 따스하다. 아주 작은 선의가 개인의 삶을, 그리고 세상을 크게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진다. 정우성도 그랬다. 최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정우성은 “지우와 순호의 관계를 통해 치유받는 느낌이 들었다”며 “시나리오를 덮자마자 촬영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마음이 이끌었기 때문일까. 영화 안에서 정우성은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인다. 부러 힘을 빼 연기했다기보다 순호가 느끼는 것을 그도 똑같이 느끼고 반응한 듯한 자연스러움이다. ‘인랑’(2018)과 ‘강철비’ ‘더 킹’(2017) ‘아수라’(2016) ‘마담 뺑덕’ ‘신의 한수’(2014) 등 최근 출연작에서 보여준 강렬한 인상을 잠시 잊게 만든다.
“일상 연기에 대한 갈망을 ‘증인’이 확인시켜 줬어요. 이른바 ‘센 캐릭터’는 디자인을 해야 하고 연기에 의도도 부여해야 합니다. 하지만 순호는 그럴 필요가 없었어요. 대사와 상황이 주는 느낌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면 됐고,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었어요. 순호를 정우성이란 배우에 얹어서 표현할 수 있는 여지도 많았습니다.” 순호가 아버지와 TV를 보며 막걸리 잔을 기울이거나 결혼 문제로 투닥거리는 장면에서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부자의 정을 나누며 대리만족을 느꼈다”고도 했다.
첫 촬영 때 연출자 이한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성씨가 순호였군요.” 신념을 다시 품으며 좋은 사람이 돼 가는 순호의 모습에 정우성이 오롯하게 포개진다. 스크린에 담기지 않은 순호의 미래를 상상해 보는 정우성의 얘기가 꼭 자신의 것인 듯 들렸다. “순호가 지우를 통해서 진정한 자아를 찾았잖아요. 앞으로도 자신을 완성해 가는 삶을 살지 않을까 싶어요.”
신념을 택한 대가로 많은 것을 포기한 순호처럼 정우성도 뜻하지 않은 오해들에 종종 부딪혔다. 지난해 제주도 예멘 난민을 우리 사회가 포용해야 한다고 말한 이후 호감 배우였던 그에게 숱한 악플과 비난이 쏟아졌다. 정우성은 “(제가) 안티 없는 배우였다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다”고 했다. “저에게 주어진 것들 중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호감 이미지도 마찬가지죠.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잃어버린 것에 연연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대신 가치관을 공고하게 할 필요는 있겠죠.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 상대방의 의견을 인정하고 합의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정우성이 배우의 사회적 책임을 고민하기 시작한 건 20대 때다. 1997년 영화 ‘비트’로 단숨에 신드롬급 인기를 모았지만 그 영화를 본 10대 학생들이 ‘형을 따라서 담배를 피웠다’고 하는 얘기를 듣고서 “영화라는 게 무섭구나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내 이윤만 추구하고 캐릭터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보지 못한다면, 가치 있는 배우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다행히 저는 어릴 때 일찍 깨우쳤어요.”
배우로서 행보뿐 아니라 정치ㆍ사회 현안에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데는 2014년 세월호 참사가 큰 영향을 미쳤다. 기성세대로서 죄스러웠고 침묵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정우성은 “지난 시대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으며 먹고사는 데 충실해야 바람직한 시민이라고 이상한 처세술을 주입했다”며 “‘너만 잘되면 돼’라는 말이 극진한 사랑 표현 같지만 혼자서만 잘 살면 과연 풍요로운 세상이겠는가”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질문한다. 그의 질문은 정답이 아닌 길을 찾기 위한 것이다. “어린 나이에 혼자 살았고 가난 탓에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죠. 성장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인맥도 없었으니 온전하게 혼자서 세상에 나를 증명해야 했어요. 그러기 위해 저 자신을 객관화할 필요가 있었고 스스로 질문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이고 보니 그 습관이 좋게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증인’ 개봉 이후엔 지난해 전도연과 찍은 새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로 관객을 만난다. 올해 장편영화 감독 데뷔도 준비 중이다. “아직 1,000만 돌파를 못 해 봤으니 정우성이란 배우에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괜한 농담을 던지며 웃는 그에게 “행복하냐”는 질문을 마지막으로 건넸다. “행복지수가 꼭 100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행복지수 10이어도 행복은 존재하는 거니까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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