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담판’ 나선 비건ㆍ김혁철
6일 북미 실무 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북측에 선(先)이행을 요구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비핵화 조치는 영변 핵 단지를 비롯한 북한 내 플루토늄 재처리 및 우라늄 농축 시설 해체다. 예고대로라면 줄곧 고수해 온 ‘전면 핵 시설ㆍ물질ㆍ무기 신고가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은 유보했을 것으로 보인다. 갑작스런 북측의 ‘평양 협상’ 제의를 수용한 것도 3주밖에 남지 않은 베트남 북미 정상회담에서 반드시 진전을 이루겠다는 비건 대표의 의지 피력이라는 게 대체적 분석이다.
이날 오전 10시쯤 평양 순안국제공항에 도착한 비건 대표는 오전 중 카운터파트인 김혁철 전 주(駐)스페인 북한대사를 만나 협상에 돌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건 대표와 김 전 대사는 지난달 17~19일(현지시간)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방미 때 상견례를 가졌지만, 2차 정상회담 의제인 비핵화 및 상응 조치를 둘러싼 본격 줄다리기는 이날이 처음이다.
평양 협상에서 비건 대표가 북측에 요구했을 비핵화 조치로 외교가에서는 영변 핵 시설 폐기나 북한 전역의 플루토늄 재처리 및 우라늄 농축 시설 해체가 유력하게 꼽힌다. 두 조치 모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직접 공약한 것이다. 지난해 9월 평양공동선언과 10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방북 당시 이뤄진 약속이다. 비건 대표는 지난달 31일 미 스탠퍼드대 강연에서 “김 위원장은 미국의 상응 조치를 전제로 북한의 플루토늄ㆍ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파괴를 약속했다. 그 상응 조치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저와 북한 카운터파트가 논의할 문제”라고 했다.
비건 대표의 예고는 그 자체로 어떻게든 성과를 거두기 위해 미측이 이번 북미 핵 담판에 전향적 자세로 임하겠다는 의향을 드러낸 것이라는 평가다. 북미 협상 상황을 잘 아는 정부 소식통은 “미국 조야에서 강력히 요구해 온 핵 신고를 비건 대표는 ‘최종적인 비핵화가 이뤄지기 전 어느 시점에 해야 할’ 과정이라며 후순위로 미뤄뒀다”며 “이것만으로도 미국이 현실적인 수준에서 비핵화 합의를 이루겠다는 의지를 북측에 전한 것”이라고 했다.
비건 대표가 평양행(行)을 수용했다는 사실도 미국의 타협 의지를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된다. 비건 대표는 3~4일 방한 기간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등 우리 측 정부 인사들과 회동할 때만 해도 북측으로부터 협상 일시와 장소를 응답 받지 못했다고 한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북측이 사실상 막판에 평양 협상을 제의한 셈인데, 북한이 일방적으로 ‘홈그라운드 이점’을 누릴 상황임에도 비건 대표가 이를 수용해 먼저 성의를 보였다”며 “3주 앞둔 정상회담에서 최대한 성과를 내고 싶은 미국의 이례적 행보”라고 했다.
좁혀야 할 북미 간 이견 폭은 여전히 넓다. 북측의 핵심 요구인 대북 제재 완화에 대해 미국이 뚜렷한 답을 주지 않고 있어서다. 하지만 북한이 핵 시설 폐기 및 검증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설지 확신이 없어 내놓지 않고 있을 뿐 미 협상팀이 준비해 둔 상응 조치 패키지는 북측이 만족할 만한 수준이라는 게 소식통들 전언이다. 북미 연락사무소 개설과 종전선언, 대북 투자 등이 거론된다. 한 정부 관계자는 “미국은 이미 제재 유연화 수준과 시점 등에 대해서도 현실적 수준에서 내부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안다”며 “북한이 이를 받아내려면 미국이 원하는 비핵화 검증 절차를 포함해 핵 시설 폐기 로드맵을 협의하겠다는 의사를 미측에 보여줘야 한다”고 전했다.
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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