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때 청와대에 있긴 했지만 보수정권 10년 동안 변변한 경력이나 전문성을 쌓지도 못한 지인이 공공기관 감사가 됐더라고요. 친한 형인데도 너무하다 싶어서 ‘공공기관 감사가 중요한 역할인데 형이 할 수 있겠어?’라고 물었더니 ‘감사를 감사가 하냐? 감사실 직원이 하지’라고 말하더라고요. 분수에 맞지 않는 직이라도 민원 통해 한 자리 얻는 걸 당연시 하는 모습에 내가 다 부끄러웠습니다.” (A의원실 보좌관 B씨)
“의원이 부처 산하기관이나 공기업에 계속 인사 민원을 해요. 저한테 대신 시키는 경우도 많은데 너무 힘들어요. 능력 있는 사람을 추천하면 저도 기분 좋을 텐데 제가 봐도 역량이 안 되는 사람을 넣으려고 하니 나도 불편해요. 청와대에도 여러 의원실 민원이 엄청 올라가요.”(C의원실 보좌관 D씨)
지난해 지인들에게서 들었던 정치권 인사민원 백태 중 일부다. 이들은 초선이나 비주류에 비해 ‘주류’에 속한 장수 의원일수록 이런 민원에 열을 올린다고 말했다. 10년 만에 다시 잡은 정권이니 국민을 위해 어떤 정책을 제시하고 어떤 나라를 만들어갈지 고민하고 노력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민원에 과도하게 집착하니, 같이 일하는 처지에서조차 보기 민망하다는 얘기였다.
정치부 경험이 없는 기자도 “국회의원은 원래 본업이 민원”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지난 2016년 청탁금지법, 이른바 ‘김영란법’ 입법 과정에서 국회가 공직자가 아닌 기자와 사립학교 교직원을 적용 대상에 추가하면서도 국회의원을 ‘예외조항’에 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다. 김영란법에는 국회의원 등 선출직의 경우 “공익적 목적으로 제3자의 고충민원을 전달하거나 법령, 정책운영 등의 개선에 관한 제안과 건의는 허용한다”는 예외조항이 들어있다. 이 예외조항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국회의원의 본업이 민원’이라는 말이 동원됐다.
최근에 이 말을 다시 한번 들었다. 양승태 재판부의 ‘재판거래’ 의혹 수사 과정에서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재판청탁’ 의혹이 불거졌을 때였다. 국회에서 오래 일한 지인은 “국회의원들은 스스로를 민원 해결사라고 생각한다”면서 “서 의원의 경우 ‘잘 봐 달라’ 수준에서 더 나아가 ‘벌금형’을 요구하고 실제로 법원이 이를 위해 움직인 사실이 이메일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일 뿐”이라고 자조하듯 말했다. 실제로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사무총장은 사안이 보도된 직후 라디오 인터뷰에서 “국회에 파견돼 있는 판사에게 억울한 사정에 대해 민원을 제기하는 것은 위법으로 보지 않는 것이 지금까지 법 해석이었다”며 두둔했다.
국회 보이콧까지 선언하며 여당이 하려는 일은 사사건건 가로막는 자유한국당도 ‘재판청탁’과 관련해선 아주 너그럽다. 임 전 차장의 공소장에는 서 의원 외에도 여야 전현직 의원들이 골고루 등장한다.
양승태 사법부는 지난 정권 청와대 및 김앤장과 협력해 일제 강제징용 재판에 개입하고 결과 바꾸기를 시도했다. 사법부 내 양심 있는 법관들이 사법개혁에 대한 목소리를 냈고 양 전 대법원장도 구속됐다. 그러나 희대의 ‘사법농단’에 대해 정작 국회는 사법개혁 법안 입법이나 판사 탄핵 등 입법기관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수사 과정에서 서영교 의원을 비롯한 다수의 여야 의원들이 재판청탁을 한 정황이 드러났는데도 철저한 징계와 재발 방지조치 대신 ‘온정주의’를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국회의원 본업이 자신을 아는 소수만을 위한 민원과 청탁인가, 전체 국민을 위한 입법활동인가. 여야를 막론하고 현재 국회의 ‘주류’는 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최진주 정책사회부 기자 parisc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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