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둘이서 한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 잠언은 사랑에 대한 귀중한 교훈으로 여기저기 인용되고 있지만, 이 잠언만큼 사랑이라는 환상을 끔찍하게 폭로하는 것도 없다. 저 잠언은 사랑이란 너와 내가 만나서 충만(♥)해지기는커녕, 여전히 텅 빈 기호(♡)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애초부터 결핍이기에 함께 바라볼 곳이 없으면 난파하고 만다. 두 사람의 조건과 지향에 따라 그 지점이 맛집ㆍ여행ㆍ섹스ㆍ타워 펠리스ㆍ자녀ㆍ사회봉사ㆍ정치ㆍ종교 등으로 달라질 뿐, 사랑으로 충만한 두 사람이 ‘한 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 대상들이 두 사람의 사랑을 생성ㆍ유지시키고 충만하게 해주는 것이 분명하다. ‘조건 만남’이 사랑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번에는 어느 지하철 역사의 스크린 도어에 적힌 ‘오른쪽 심장’이라는 시를 보자. “심장은/ 원래 두 개였거나/ 하나씩 나눠 가진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덥석 안은 그 순간/ 원래 것처럼/ 같이 뛸 리가 없다// 내 심장이/ 오른쪽 심장을/ 몰라 볼 리 없다” 이 질겁할 시는 2017년 시민공모작 당선작이다. 아마추어가 썼다고 혹평하는 게 아니다. 사실 이런 식겁할 시는 고명한 일급 시인들의 시에도 수두룩하다. 한국의 대다수 사랑시는 아직도 청소년용이다. 물론 이 잘못은 전적으로 시인들에게 물을 것이 아니다.
원래 하나였다가 둘로 나눠진 두 사람이 서로를 발견하고 다시 합치는 것이 사랑이라는 정의는 플라톤의 ‘향연’(문학과지성사, 2003)에 나온다. “인간의 본래 상태가 둘로 나뉘었기 때문에, 그 나뉘어진 각각은 자기 자신의 또 다른 반쪽을 갈망하면서 그것과의 합일을 원하게 되었다네. 그래서 그들은 팔로 상대방을 껴안고 서로 얼싸안으며 한 몸이 되기를 원하고, 상대방 없이는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아서 굶주림 또는 무기력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망과 노력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라네. 반복하건데 확실히 전에는 우리가 하나였다네!”
실연을 하고 대중가요로 애도 작업을 하는 이유도 대중가요가 그만큼 플라톤의 교의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민희라의 ‘미소’, 펄시스터즈의 ‘기다리겠오’, 장현의 ‘기다려주오’, 이승연의 ‘나는 누굴 믿어’, 루비나의 ‘비오는 공원’, 정수라의 ‘환희’, 서울패밀리의 ‘이제는’, 심수봉의 ‘사랑했던 사람아’, 조덕배의 ‘슬픈 노래는 부르지 않을거야’, K2의 ‘잃어버린 너’. 이 노래들은 내가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하느님께 신청해서 들어야 할 노래들의 일부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예찬’(길, 2011)에서 철학의 임무는 사랑을 보호하는 것이며, 나아가 “사랑을 재발명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는 ‘조건들’(새물결, 2006)에서 사랑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하기 전에,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잘못된 정의 세 가지를 앞서 제시한다. 그 가운데 첫 번째로 꼽은 것이 “사랑은 융합적인 것”이라는 관념이다. 그러나 사랑은 결코 “둘이 황홀한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황홀한 하나란 두 사람 속에 있는 무수한 다수는 물론 세계를 제거함으로써만 설정될 수 있다. 그런 동일성은 두 사람 자신과 세계에 대한 테러와 재난으로 변한다. 바디우는 ‘철학을 위한 선언’(길, 2010)에서 사랑은 일자(一者)가 아니라 비로소 “둘이 사유되기 시작하는 지점”이며, 사랑은 “일자의 법칙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초과를 구성”하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우매하게 시작하는 사랑은 둘이서 하나 되고자 서로의 살과 영혼을 집어 삼킨다. 그러나 지혜로워지고 나서는 집어 삼킨 연인의 살과 영혼을 토해낸다. 삼키고 토하는 과정을 죽을 때까지 계속 하겠다고 맹서하는 것이 사랑이다. 타자의 살과 영혼을 삼키고서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면역성을 제거시킨 두 사람은, 여덟 개의 사지와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이 된다. 동일성은 세계에 테러를 행사하고, 윤리마저 파괴한다. ‘박근혜ㆍ이명박 석방운동’을 하겠다는 홍군이 그러하지만, 현재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연인은 ‘문파’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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