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이 키우며 얻은 깨달음, 사회복지사 활동에도 쏠쏠하게 활용
“아이 넷을 키우려니 맞벌이는 불가능했습니다.”
2010년, 인테리어 회사에 다니던 남편이 직장을 그만뒀다. 그때부터 남편이 육아에 전념하고 아내인 임소영(43)성보재활원 사무국장이 혼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임국장은 “지금의 상황이 거짓말 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면서 “결혼할 때만 해도 다둥이 엄마가 될 거라곤 전혀 예상 못했다”고 고백했다.
“결혼할 때는 정말 진지하게 애 낳지 말고 우리 둘이서 재밌게 살자고 했어요.”
세상일이 다 그렇듯 막상 살아보니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27살에 결혼해 2년 후에 딸을 낳았다. 셋째까지는 시댁에서 키웠다. 남편이 종손인 데다 시부모님이 워낙 아이들을 좋아한 까닭이었다. 생각의 변화가 온 건 넷째를 낳고 난 후였다.
“아이 넷을 맡기려니까 너무 죄송하더라고요. 그래서 둘 중 한 명이 육아에 전념하기로 하고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왔죠. 그때가 2012년이었어요.”
◇ 학원은 1개씩만, 그래도 잘 크는 아이들
남편이 직장을 그만둔 후 자린고비 가족이 됐다. 우선 이사부터 했다. 대구시 동구 반야월 동호지구로 집을 옮겼다. 집값과 함께 인근에 있는 초중고 학교까지의 거리도 고려했다.
“교통비라도 아끼자는 생각이 들었죠. 현재 큰딸이 중학교 2학년이고 그 밑으로 6학년, 3학년, 1학년인데, 여느 아이처럼 차를 타고 다니면 네 아이 차비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하죠.”
사교육도 원칙을 정했다. 학원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한 사람당 1과목만 듣도록 했고, 방과후학교도 일정 금액 이상은 안 된다고 못 박았다. 학원을 많이 안 다녀도 성적은 곧잘 나온다. 남편의 공이 크다. 틈만 나면 책을 읽어주는 까닭이다. 그 덕에 아이들 모두 말귀와 글귀가 좋아 이해력과 표현력이 좋다.
늘 부지런하고 자상한 남편이지만 섭섭할 때도 있다. 야근 후 집에 돌아왔을 때 아이들과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은근히 화가 난다. ‘나는 직장에서 힘들게 일하는데 자기는 집에서 뭐라도 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는 생각이 불쑥 들어서다.
그래도 무슨 일만 있으면 남편이 제일 든든한 지원군이다.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으면 남편은 한 마디도 흘리지 않고 다 들어주면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맞장구를 친다. 그보다 훌륭한 힐링이 없다.
“다 털어놓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고 다시 일할 힘이 납니다. 남편이 제일 고마운 순간이죠.”
◇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말고 관찰만 해라
아이들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운다. 무엇보다 첫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서 재활원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바뀌었다. 재활원에 있는 장애아들은 대부분 엄마의 온기를 채 느끼기도 전에 기관으로 보내졌다. 아이들이 예상 밖의 행동을 할 때마다 느꼈던 당혹감이나 짜증이 측은한 마음으로 바뀌었다. 어머니의 따뜻한 체온과 교감을 누리지 못해 발생하는 결핍의 결과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임국장은 “내 아이를 돌보듯 재활원 아이를 돌보면 못해도 90점은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입 직원들을 교육할 때 육아에서 깨달은 것들을 많이 알려줘요. 우선, 처음 일주일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이들을 관찰하라고 해요. 그래야 아이들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거든요. 이것 역시 육아에서 얻은 교훈이예요. 엄마는 아기가 울 때 왜 우는지 알아차리잖아요.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깊이 관찰한 덕에 울음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능력이 생기는 거죠. ”
아이들을 키우기 전에는 원칙과 기준을 제일 중요시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원칙만큼이나 개성을 존중하고 구성원들끼리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아이들은 차를 탈 일이 있으면 으레 앞자리에 앉고 싶어 서로 다툰다. 임 국장도 처음엔 순번을 정해서 4남매가 돌아가면서 앞자리에 앉도록 했지만, 언젠가부터 자유롭게 놔두었다. 한 아이가 순서에 상관없이 앞에 타겠다고 고집하자 나머지 세 아이가 “쟨 앞자리가 워낙 좋은가봐”하면서 그 아이의 개성을 받아들인 까닭이다. 원칙을 적용할 필요가 없어진 거였다. 서로 이해하면 굳이 원칙을 들이댈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 이 역시 재활원 아이들을 돌볼 때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 가족 밴드 만들어 봉사활동하는 것이 꿈
아이들이 많아 행복하다는 생각을 가장 절실하게 한 건 3년 전쯤이었다. 누군가 재활원과 관련된 투서를 했다. 억울했지만 상부 기관의 감사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전직원이 몇 달에 걸쳐 야근을 했다. 그때 가장 큰 힘이 된 것이 아이들이었다.
“파김치가 되어서 집에 돌아오면 네 아이가 강아지처럼 ‘엄마!’ 하고 달려오는데 눈물이 핑 돌았어요. 가족이 있어 정말 좋구나, 하는 생각을 절절하게 했죠.”
동시에 투서한 이들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대부분 가족 없이 외롭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그들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얼마 전 가족 회의에서 새로운 목표를 하나 정했다. 가족 밴드를 만드는 것이다. 가족들이 나름 음악에 재능이 있다. 임 국장은 피아노를 치고 남편은 드럼이 특기다. 딸은 합창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가족 밴드를 만들어서 시설에 봉사활동을 다니고 싶어요. 아들 셋도 남편의 재능을 물려받았는지 음악에 관심이 많아요.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더욱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가고 싶어요. 나중에 가족 밴드 구성하고 나면 아이들과 함께 가족 인터뷰를 하고 싶어요!”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신정미 객원기자(사회복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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