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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민석의 성경 ‘속’ 이야기] 성경을 ‘깨닫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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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민석의 성경 ‘속’ 이야기] 성경을 ‘깨닫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

입력
2019.02.02 04:40
수정
2019.02.06 11:17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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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성경, 읽지 말고 듣자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성경의 멋진 여정을 가이드 해드리겠노라고 약속하며 이 칼럼을 쓴지 벌써 일 년이 넘어가 버렸다. 아직도 돌아보아야 할 멋진 곳은 많지만, 이제는 그만 돌아갈 때가 된 것 같다. 그랬더니 나에게 지도 받는 한 학생 녀석이, 교수님의 글은 아담의 배꼽에서 시작해서 바울의 대머리로 끝난다며 은근 날 놀렸다. 사실 맞는 말이다. 어찌하든 성서의 세계에 독자의 시선을 끌어보려고 온갖 재주를 다 부려보았다.

인류 역사의 최고 베스트셀러지만, 사실 성경을 잘 안 읽는다. 베스트셀러지만 그저 관상용일 뿐이다. 학교 교과서가 그리스 신화는 가르치지만 성경은 잘 알리지 않는다. 인간 정신사, 특히 서구의 인문·예술에 성서가 더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도 말이다. 이유는 성서가 특정 종교와 관계하기 때문일 것이다. 독자분들과 함께 나름 애써서 이곳저곳 기웃거렸지만, 이제는 내가 연주하는 코드가 그저 비슷해졌다. 그만 쓸 때가 왔다.

성경을 소개할 때마다, 마치 노래의 후렴구처럼 늘 반복하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 이 여정도 같은 후렴구로 마치려 한다. 수백 번 불렀지만, 또 불러야 할 노래의 하이라이트다.

어떤 시인이 자기 책에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적어 넣었다. 이것을 읽은 어떤 과학자가 그 시인의 가슴에 칼을 대고 “어디 가슴 좀 열어봅시다. 호수가 있나 없나 확인 좀 하게” 이렇게 말 한다면 웃기 어려운 우스운 일이 된다. 시인의 글이 ‘시’라는 장르에 속한다는 것을 모르기에 나온 무지의 소치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는 논리 실증적인 과학적 명제가 아니라 로맨틱한 문학적 은유다.

어느 누구든, 성서를 읽을 때면 이 책의 합당한 장르부터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모두들 엉뚱한 싸움을 하게 된다. 성서 안에는 워낙 다양한 성격의 글들이 섞여 있기에 전문적인 용어 하나로 그 장르를 지정하기가 어렵다. 시와 이야기, 설교, 서신, 묵시 등이 모여 있는 성경을 그래도 가장 포괄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정의는 ‘신앙 고백서’다.

성경은 역사서도 과학서도 아니다. 신문이나 뉴스처럼 고대 이스라엘에 벌어진 사건들을 액면 그대로 보고해 주고 실시간 동영상을 보여주는 미디어가 아니다. 창조론을 증명하기 위해 창세기 1장이 적힌 것도 아니다. 성서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역사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고백하는 간증이다.

이스라엘 사해에서 발견된 성경 두루마리의 일부. 이사야서를 담고 있다.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성경이다.
이스라엘 사해에서 발견된 성경 두루마리의 일부. 이사야서를 담고 있다.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성경이다.

동시에 성경은 역사적 문물이다. 한국인이 학교에서 단군신화를 배우듯,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시바에서 창세기를 배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인류 역사에 성경은 남겨진 문헌 그 이상의 삶을 살아 왔다. 이스라엘의 역사 문화를 넘어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 책을 신의 ‘말씀’이라 믿고 따라왔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을 잘 읽으려면, 신앙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도 전 인류가 사랑하는 명작 중 하나다. 이 위대한 작품을 잘 알기 위해 줄거리도 공부하고, 16세기 영어도 연구하고, 작가인 셰익스피어를 탐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을 모르는 사람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으면, 이 작품의 참 맛은 전혀 알 길이 없다. 사랑 때문에 써졌고, 사랑 때문에 읽혀왔으며, 사랑 때문에 보존되고 있다. 어린이들은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책이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적 문화적 보고이기도 하지만, 성경은 애초 신앙 때문에 만들어졌고, 신앙을 전수하게 위해 보존되었으며, 지금도 신앙을 위해 읽혀지고 있는 책이다. 성서가 그저 고대의 유물이 아닌 것은 신앙이라는 성서의 실존적 조건 때문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신앙이 없으면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성경을 알았다 할 수 없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보자. 과연 성경을 많이 알아야 훌륭한 신앙인이 되는 것일까. 어느 나라보다 교육열이 높고 예부터 양반들의 경전 읽기가 숭상되었던 우리 한국인들만의 독특한 경향이 아닐까. 종종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온 일부 신앙인들에게서도 유사하게 성경을 경전처럼 모시고 그 문자적 읽기에 얽매어 있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래서 성경은 스스로 올바른 성서 읽기에 대하여 가르쳐 준다. 성경을 읽고 ‘깨달음’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듣다’라는 동사와 ‘행하다’라는 동사를 연계하여 자주 말씀 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나더러 '주님, 주님!' 하면서도, 내가 말하는 것은 행하지 않느냐? 내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과 같은지를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반석 위에다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그 집은 흔들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이 맨흙 위에다가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고.” (누가복음 6:46-49)

행하는 것보다 깨달음을 더 좋아하면 자기만 좋고 주변은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자기만 좋으라고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면 우리는 믿자마자 천국에 직행해야지 더 이상 이 땅에 있을 이유가 없다. 기독교는 깨달음을 음미하고 향유하는 고상한 종교가 아니다. 들었으면 즉각 실천으로 옮겨야 하는 설쳐대는 종교다.

유관순의 선생님 이셨던 앨리스 샤프와 학생들
유관순의 선생님 이셨던 앨리스 샤프와 학생들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이들을 돌보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있기에, 자연스럽게 한국에서는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유관순 열사의 첫 스승이 앨리스 샤프 (Alice Sharp•한국 이름 ‘사 애리시’) 선교사였기에, 그녀는 거리로 뛰어 나가 외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인으로서 김구는 끝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키며 항거했으며, 시인 윤동주의 신앙도 일제의 압제로 인해 민족주의와 결합할 수밖에 없었다. 성경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자 했던 신앙인의 결단은 역사 가운데 숭고한 희생의 족적을 남겼으며, 결국 성경을 가장 잘 읽는 것이 무엇인지 그 모범을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읽기에서는 많이 아는 것보다 조금만 알아도 잘 행하는 것이 참 읽기다. 뿐만 아니라 성경을 잘 알아야만 좋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엘리트주의적 발상이다. 머리 좋고 공부 많이 하여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 훌륭한 신앙인이 되는 거라면, 전국 신학교들의 성서학 교수님은 거의 성자가 되어 있으셔야 한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이 세상에는 성경은 마다하고 글자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더불어 성경은 꽤 지식 수준이 높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전 세계에 우리나라나 서구 선진국들을 제외하고 초등학교 이상까지 공교육을 제공하는 나라가 얼마나 될까. 성경은 단 한 줄도 읽지 못해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목사님이 대신 읽고 가르쳐 주신 성경의 말씀처럼 이웃을 위해 인심 후하게 사시는 어느 장터의 할머니가 있다면, 그분이 신학 박사보다 더 훌륭한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성경이 말하는 천국이다.

그래서 성서를 읽는 신앙인은 독특한 고백을 한다. 아침에 일어나 말씀 묵상을 하면서 사실 눈으로 성경의 문자를 읽었지만, ‘오늘 나는 아침에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읽지만 듣는 고유한 종교 경험을 한다. 이는 성경이라는 책의 고유한 본질이 무엇인지 알게 하여 준다. 읽지 말고 들어야 한다. 정말로 내가 들었는지 어떻게 아는가. 내 삶과 내 주변에 나로 인하여 변화가 오면 들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읽은 것뿐이다. 성경은 읽지 말고 들으시길 마지막 여정 길에 부탁드린다. (위 글의 일부는 저자의 저술 ‘구약의 뒷골목 풍경’에서 편집 발췌한 것임을 밝힌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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