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괴물 총망라한 ‘한국괴물백과’ 낸 곽재식 작가
‘강철’. 커다란 소를 닮은 것 같기도, 말을 닮은 것 같기도, 용을 닮은 것 같기도 한 괴물. 주변을 뜨겁게 하는 바람이나 연기를 뿌리는데, 그 정도가 강하고 상당히 멀리 퍼지는 데다 사방으로 날뛰며 사납게 덤벼들어 사람에게 큰 피해를 준다. ‘강철이 가는 곳은 가을도 봄 같다’는 표현이 생길 만큼 농민들에겐 흉년을 상징하는 사악한 존재로 얘기됐다. ‘강철이 쫓기’라는 민속놀이가 전해지는 지역이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괴물이었지만, 어느새 위세가 꺾여 아무도 강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2019년 강철이 다시 나타났다. 곽재식(37) 작가가 강철을 소환했다. 최근 출간된 ‘한국괴물백과’에는 고전 문헌에서 곽 작가가 채집한 한국 전통괴물 282종이 일러스트와 함께 실려있다.
곽 작가는 2007년 괴물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한국 괴물을 ‘총망라’ 하겠다는 거창한 사명감을 품은 건 아니었다. “역사 소설을 써볼까 싶어 조선 중기 편찬된 설화집 ‘어우야담’ 번역판을 사보게 됐고, 그 안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깃거리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재미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괴물 이야기만 뽑아 인터넷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한 것이 계기였죠.” 그렇게 11년간 꾸준히 모은 282종의 괴물은 ‘백과’라는 이름이 딱 어울리는 묵직한 656쪽짜리 책이 됐다.
곽 작가는 현실세계에선 ‘곽 부장’이다. 카이스트에서 화학을 전공했고, 화학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괴물은 곽 작가의 외도 목록 중 하나다. 추리소설, 과학소설을 쓰고 인공지능 로봇을 다룬 산문집 ‘로봇공화국에서 살아남는 법’(2016)을 냈다.
곽 작가의 블로그는 어느새 한국 괴물 전문 아카이브로 이름났다. 민속학 연구자, 소설가, 게임 및 웹툰 시나리오 작가, 학생 등 다양한 창작자들 사이에서 ‘그 블로그에 가면 괴물 자료를 볼 수 있다’는 입소문이 났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형 판타지’가 필요하다고 하잖아요. 한국 전설 속 괴물이나 신기한 보물 같은 것을 정리해 두고 자료를 이야기 만드는 사람들이 돌려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괴물이 이렇게나 인기 있는 존재였을까. 책은 일주일 만에 2쇄를 찍었다.
한국의 전통 괴물 목록을 정리하려는 시도를 곽 작가가 처음 한 것은 아니다. 이전 자료엔 출처, 원전이 불분명한 내용이 많았다. “한국의 대표적인 괴물이라 할 수 있는 도깨비를 소개한다면서 대중 매체에 나오는 막연한 인상을 섞는 식인 거죠.” 곽 작가가 보기에 가장 왜곡된 괴물은 여우다. “대중문화는 여우를 요사스러운 ‘여자’가 둔갑한 동물로 그렸어요. 그런 비유가 사용되기 시작한 건 근대 이후예요. 그 전 기록을 찾아보면 여우가 여자로 변해서 사람을 홀렸다는 내용은 별로 없어요.” 여우가 요망한 여자의 상징물이 된 첫 사례는 1979년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이라는 게 곽 작가의 분석 결과다. 배우 한혜숙이 1대 구미호를 연기했고, ‘미모의’ 배우들이 돌아가며 TV 브라운관 속 구미호로 변신하는 게 여름의 클리셰였다.
한낮의 햇빛 속에서 유리 거울로 살펴보면 갑자기 거울 속에 나타난다는 ‘망량’, ' 모습은 사람 같은데 80~90세쯤 되면 서서히 농어나 홍어 같은 물고기로 변한다는 ‘병화어’, 대나무로 만든 통에 사는 비쩍 마른 어린아이 ‘염매’… 곽 작가가 문헌, 자료를 뒤져 캐 모은 괴물들이다. 곽 작가는 정확한 원전 기록이 남아 있는지를 꼼꼼하게 따져 가며 괴물 자료를 수집했다. 책에 실린 282종의 괴물 이름 옆에는 출처가 명기돼 있다. 곽 작가가 찾아본 참고문헌만 166개. 가야산기(18세기 조선에서 이덕무가 가야산을 여행하면서 쓴 기행기)부터 훈몽자회(1527년 최세진이 한자 학습을 위해 정리한 것)까지, 시대와 종류를 넘나든다. “한글로 번역된 고전을 도서관에서 봤고, 한국고전번역원이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놓은 자료도 검색했어요. 절판된 책을 구하려고 발품도 꽤 팔았죠. 그저 재미로 신비한 이야기를 모아 보려 시작한 일이 멋진 이야기나 아름다운 그림으로 바뀌어 세상이 도움이 되고 있다니, 그 자체로도 신비하고 재밌는 일이네요.”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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