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런 설은 없었다. 명절 연휴마다 대작 영화들의 박 터지는 전쟁터가 되곤 했던 극장가가 올해 설에는 휴전협정이라도 맺은 듯 평화롭다. 스케일로 압도하는 영화는 줄어든 대신 작지만 알찬 재미로 무장한 영화들이 사이 좋게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코미디, 액션, 애니메이션, SF까지 장르도 다양해 고루고루 보면 더 좋다. 설 연휴가 시작되기도 전에 500만 관객을 불러모은 ‘극한직업’과 그 뒤를 이어 힘차게 출동한 ‘뺑반’이 한국 영화 대표 주자로 나선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영화 ‘드래곤 길들이기 3’는 어린이ㆍ가족 관객에게 맞춤이다. 연휴 막바지에는 할리우드 대형 프로젝트 ‘알리타: 배틀 엔젤’이 출사표를 던진다.
‘닭’치고 웃음 ‘극한직업’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온갖 패러디를 양산하며 벌써 유행어가 된 이 명대사를 아직 모른다면 당장 극장으로 가야 한다. 이 대사의 주인은 치킨집 사장님도 갈비집 사장님도 아닌 경찰서 마약반의 만년 반장 고 반장(류승룡). 영화는 실적 부진으로 해체 위기에 놓인 마약반 형사 5인이 범죄조직의 아지트 앞 치킨집을 인수해 잠복 수사를 하다가 그 치킨집이 일약 맛집으로 소문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린다. 수사를 하러 닭을 파는 것인지, 닭을 팔러 수사를 하는 것인지, 정체성 혼란을 느끼는 형사들의 모습이 눈물 나도록 웃기다. 그렇게 웃다가는 없던 복근도 생길 것 같다. 어딘가 허술해 보였던 그들이 감춰둔 필살기를 꺼낼 때면 뜻밖의 감흥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 모두가 ‘진짜 슈퍼히어로’라는 힘찬 응원으로 다가온다. 류승룡을 필두로 이하늬, 진선규, 이동휘, 공명, 신하균, 오정세 등 배우들의 연기도 매우 맛깔스럽다. 15세 관람가.
닥치고 질주 ‘뺑반’
굉음을 내며 맹렬하게 질주하는 슈퍼카를 보고 있노라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먼저 개봉해 멀찌감치 앞서 있는 ‘극한직업’을 따라 잡겠다는 듯이 영화는 줄기차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댄다. ‘뺑반’은 교통계 뺑소니 전담반을 뜻하는 경찰 은어. 경찰 내 엘리트 조직인 내사과 소속 경위 은시연(공효진)은 온갖 비리를 저지른 F1 레이서 출신 사업가 정재철(조정석)을 무리하게 수사하다 뺑소니 전담반으로 좌천된다. 그곳에서 자동차에 천부적 감각을 지닌 순경 서민재(류준열)와 뺑반 반장 우선영 계장(전혜진)을 만나 의기투합한 은시연은 정재철을 잡기 위해 수사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배우들이 대역 없이 90% 이상 직접 소화한 자동차 추격전이 단연 볼거리다. 할리우드 액션물 같은 화려함은 없지만 속도감만큼은 탁월하다. 통제불능 스피드광으로 변신한 조정석, 어수룩한 겉모습과 어두운 내면을 매끄럽게 변주한 류준열, 그 사이에서 든든하게 무게중심을 잡은 공효진 등 배우들의 팀플레이가 돋보인다. 15세 관람가.
아름다운 작별인사 ‘드래곤 길들이기3’
전 세계가 사랑한 바이킹 소년 히컵과 용 투슬리스에게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쿵푸팬더’ ‘슈렉’을 제작한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명가 드림웍스의 대표작 ‘드래곤 길들이기’ 시리즈가 ‘드래곤 길들이기 3’로 막을 내린다. 1, 2편은 서로 대립했던 인간과 용이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어 외부 공격으로부터 함께 부족을 지키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그 사이 약골 소년 히컵은 족장으로 성장했고, 충직한 친구 투슬리스는 그의 곁을 지켰다. 마지막 3편에서 두 친구는 용의 천국 히든월드를 찾아 새로운 모험을 떠난다. 활공 액션과 대규모 전투 장면 등 볼거리가 풍성하다. 특히 히든월드에는 6만5,000마리가 넘는 용이 한꺼번에 등장해 장관을 이룬다. 강인한 지도자로 거듭난 히컵과, 다른 용을 만나 사랑에 빠진 투슬리스는 용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위해 스스로 운명을 선택한다. 홀로서기로 더욱 단단해지는 두 친구의 우정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전체 관람가.
인간적인 사이보그 ‘알리타: 배틀 엔젤’
설날 당일인 2월 5일 사이보그 소녀가 관객을 찾아온다. 설날에 SF영화라니. 차례상에 올려진 피자처럼 이색적인 조합이라 더욱 눈길이 간다. ‘알리타: 배틀 엔젤’은 공중도시와 고철도시로 나뉜 26세기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사이보그 소녀 알리타가 자신을 위협하는 악의 세력에 맞서는 이야기다. 영화 ‘아바타’로 ‘3D 혁명’을 일으킨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아바타’ 이전부터 준비해 온 필생의 역작으로 유명하다. 캐머런 감독이 제작을 맡고,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이 연출했다. 알리타는 피부 모공부터 눈동자 무늬까지 인간과 똑같이 닮았지만, 100% 컴퓨터그래픽(CG) 캐릭터다. 인간까지 만들어내는 시각효과 기술의 진보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알리타가 날렵한 무술과 무시무시한 괴력으로 악당들을 박살내는 액션 장면만으로도 오락물로서 본분을 다한다. 공중도시와 고철도시 간 계급갈등, 진정한 인간다움을 고민하는 사이보그, 인간과 기계가 혼재된 디스토피아 사회 등 영화에 담긴 주제의식이 제법 묵직하다. 12세 관람가.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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