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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캔 스피크” 김복동 할머니를 이렇게 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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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캔 스피크” 김복동 할머니를 이렇게 기립니다

입력
2019.01.29 11:04
수정
2019.01.29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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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연 “평화 나비로 살다 가신 할머니”

심상정 “양심 깨운 투사, 어찌 눈 감으셨나”

변영주 “각국 피해여성과 기꺼이 하나 돼”

김복동 할머니는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정기 수요집회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생전의 할머니가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에 참석한 모습. 심현철 코리아타임스 기자
김복동 할머니는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정기 수요집회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생전의 할머니가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에 참석한 모습. 심현철 코리아타임스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28일 밤 영면에 들었다. 김 할머니는 성노예 피해의 고통을 이 땅의 여성인권과 평화운동의 동력으로 삼아 이에 평생을 바쳤다. 지금과는 시대 분위기가 사뭇 달라 ‘위안부 피해자’임을 드러내기 쉽지 않았던 1992년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힌 뒤 이듬해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일본의 만행을 증언했다. 나아가 할머니는 역으로 한국군이 가해자였던 베트남 전쟁의 성폭력 피해 여성들에게 대신 사죄하고 연대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래서 김 할머니에게는 ‘위안부 피해자’라는 수식어보다 ‘여성인권운동가’ 혹은 ‘평화활동가’라는 말이 더욱 어울린다. 그런 김 할머니의 별세 소식에 생전 할머니와 인연을 맺었던 여러 인사들이 글로써 슬픔을 표현했다. 저마다의 부고 기사인 셈이다.

◇정의연 “평화 나비로 사신 김복동 할머니”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는 김 할머니의 생전 활동과 어록을 소개했다. 정의연은 김 할머니를 ‘국경을 넘어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의 초국적인 연대로 이 세상을 평화로 만들고, 전시 성폭력 피해의 재발을 막는 새로운 희망’이라고 소개했다.

정의연이 밝힌 김 할머니의 간략한 생애사에 따르면, 김 할머니는 1926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났다. 14살이 되던 1940년 전쟁터에 끌려가 일본군의 침략 경로인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로 끌려 다니며 성노예 피해를 당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1992년 3월 일본군 ‘위안부’로서 피해를 입은 사실을 밝혔고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1992년 8월 제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 1993년 6월 오스트리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의 증언대에 섰다. 할머니는 그렇게 생존하지 못했거나 익명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피해자들의 상징이 됐다.

정의연은 “김복동님은 거리와 미디어에서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제대로 된 배상을 요구해온 인권ㆍ평화 활동가”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무력분쟁 중에 만연하게 자행되고 있는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한 평화 나비가 되어 평화운동을 이끌어 왔다”고 고인을 기렸다.

◇생전 어록 “전쟁 없는 나라가 소원”

2017년 8월 15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 타종행사에서 박원순 시장(왼쪽 세번째)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앞줄) 할머니 등 참석자들이 타종을 마친 뒤 만세 삼창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7년 8월 15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 타종행사에서 박원순 시장(왼쪽 세번째)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앞줄) 할머니 등 참석자들이 타종을 마친 뒤 만세 삼창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의연은 할머니 생전의 주요 발언도 소개했다.

“나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지만, 그래서 지금도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에 서서 우리에게 명예와 인권을 회복시키라고 싸우기를 계속하고 있지만, 지금 세계 각지에서 우리처럼 전시 성폭력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여성들을 돕고 싶습니다.” -2012년 3월 8일(세계여성의 날), 나비기금 설립 기자회견에서 김복동 할머니의 선언

“나도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 피해를 입었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에게 한국 국민으로서 사죄를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열심히 나비기금을 모아서 지원하겠습니다… 앞으로 커가는 후손들과 어린애들은 절대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되니, 각국 나라에서 전쟁이 없는 나라가 되도록 힘을 써주면 좋겠습니다.” -2014년 3월 8일, 베트남 전쟁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에게 사죄와 연대메세지

“우리 나라도 서로가 화합하여, 서로가 한발씩 물러나서 남북통일이 되어서 전쟁 없는 나라 다시는 우리들과 같은 이런 비극이 안 생기도록 전쟁 없는 나라가 되어서 여러분들의 후손들은 마음 놓고 살아가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 2016년 10월 5일, 수요시위에서

◇변영주 감독 “세상 모든 피해여성의 깃발”

변영주 감독은 김 할머니를 ‘세상 모든 피해여성의 깃발’이라고 표현했다. 변 감독은 다큐멘터리 영화 ‘낮은 목소리’ 시리즈(1995년~)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담아 공론화했다.

변 감독은 29일 인스타그램에 “김 할머니는 세상 모든 것을 수줍어하고, 실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조차 힘들어 하던 그런 분이셨다”며 “그럼에도 그녀는 세상에 스스로를 밝히고 전선의 앞줄에 힘겹게 섰다”고 적었다. 이어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아프리카에서, 중동에서, 동유럽에서 그녀와 같은 고통을 겪은 동생들과 하나가 되었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도 블로그에 글을 올려 김 할머니를 애도했다. 심 의원은 “작년 9월 어느 비 오던 날, 당신은 투병중인 노구를 이끌고 또 1인시위에 나서셨다”며 “그 때 빗속의 당신은 신의 모습이셨다”고 적었다. 심 의원은 “당신은 마치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기미독립선언서 행동지침의 모범을 보이듯 사셨다”며 “일본의 사죄를 받지 않고는 죽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 어찌 눈을 감으셨느냐”고 애통해했다.

심 의원은 “당신의 용기는 감추어진 역사를 들추어내고 양심을 뒤흔들어 깨웠다”며 “당신은 모진 삶을 승화시킨 불굴의 투사이자 평화 운동가였다”고 고인의 뜻을 되새겼다. 그러면서 “끝내 당신의 평화나비들과 함께 일본의 사죄는 받아 내겠다”고 다짐했다.

여성학자 이나영 중앙대 교수도 페이스북에 “믿어지지 않는 슬픔”이라고 고인을 보내는 마음을 표현했다. 이 교수는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베트남전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에게 할머니께서 보내신 조화를 바쳤다”고 떠올리며, “우리 모두에게 남기신 마지막 유언처럼 인권운동가 김복동 할머니의 뜻을 실천하며 살겠다”고 적었다.

◇라디오선 할머니 생전 인터뷰 재방으로 추모

2014년 8월 방한 중이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명동성당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 집전에 앞서 김복동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위로의 뜻을 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4년 8월 방한 중이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명동성당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 집전에 앞서 김복동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위로의 뜻을 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는 이날 생전 김 할머니와 한 인터뷰의 육성을 다시 방송했다. 2016년 8월 26일의 음성이다. 당시는 박근혜 정부가 2015년 12월 일본 정부와 이른바 ‘한ㆍ일 위안부 합의’를 졸속으로 한 뒤, 후속 논의를 이어가던 시점이었다. 이 합의의 산물로 만들어진 화해치유재단의 피해자 지원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 시기를 봐 일본의 요구 사항 중 하나인 소녀상 이전을 관련 단체와 협의할 뜻을 우리 정부가 내비쳐 비판이 일었다.

이와 관련해 인터뷰에서 김 할머니는 “속상해 죽겠다”며 “정부가 뭔가 잘 못 알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할머니는 “우리는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일본이 당당하게 자기들이 한 짓이라고 바른 말을 해서 우리(피해자들)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법적으로 배상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100억이고 1,000억이고 줘도 우리는 사죄 받기 전에는 그 돈 필요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당시 김태현 화해치유재단 이사장이 ‘접촉해보니 1억 원을 주면 한을 풀겠다고 한 할머니들이 많았다’고 한 발언을 두고도 “거짓말”이라며 “정신도 없고 몸이 아픈 할머니들을 찾아가 ‘한 푼이라도 받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회유를 해서) 말을 하는 모양이다. 할머니들을 팔아먹는 것”이라고 분노를 표현했다.

당시 인터뷰를 했던 진행자 김현정 앵커는 “아마 이때도 투병 중이셨을 텐데 굉장히 적극적이셨다”며 “27년간 수요집회를 한 번도 안 빠트리고 나가셨을 정도”라고 말했다. 김 앵커는 그러면서 “할머니가 평온하게 눈을 감으셨기를 바란다”고 명복을 빌었다.

김 할머니의 빈소는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장례식장 특1호실에 차려졌다. 장례식은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시민장’으로 치러진다. 2월 1일 발인 뒤 오전 10시 30분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노제(영결식)가 열릴 예정이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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