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노동’하며 산다. 공적인 노동에는 계약이 따른다. 그 계약에 따라 노동을 제공하고 대가를 지불받는다. 그건 비정규직 노동도 마찬가지다. 정식 문서 대신 구두로 정하는 경우도 많지만 원칙적으로는 계약서를 써야 한다. 그런데 ‘제로아워(zero-hour)’계약이라는 게 있다. 그걸 들어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는 이들에게도 곧 그런 계약서가 들이밀어질 것이다.

노동 계약할 때 기본적으로 월급이나 시급 얼마 하는 방식을 따른다. 그리고 하루에 몇 시간 노동할지를 정한다. 하지만 제로아워 계약은 말 그대로 최저 근무시간이 0시간이다. 상상이 가는가? 그러나 이미 현실이다. 곧 일반적 현실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식당의 경우 하루 종일 일할 게 없다. 그래서 바쁜 점심과 저녁 시간에 일한다. 그런 계획에 따라 시급과 노동시간을 정한다. 하지만 매일 점심 저녁이 바쁜 게 아니다. 어떤 날은 이상하게 손님이 없을 수 있다. 주인 입장에서는 매상도 없고 노동도 없는데 시급은 지불해야 한다. 이중으로 손해다. 그런데 일자리는 없고 일할 사람들은 넘친다.

자, 당신이 고용주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원하는 시간에 불러 쓰고 딱 그만큼의 임금만 지불하면 된다. 어차피 나도 힘들고 일자리 찾는 이들은 많으며 언제든 부를 수 있는 통신체제니 충분히 가능하다. 자, 이번에는 내가 그런 일자리라도 필요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까? 집에서 전화만 기다린다. 연락이 오면 일할 곳으로 달려간다. 때론 한 시간 넘는 거리다. 그런데 도착했더니 이미 다른 사람이 나보다 먼저 와서 일한다. 허탈하게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 시간 넘는 거리를. 다음날부터는 식당 근처에 미리 나와 기다린다. 커피 값도 아까우니 근처 길에서 배회한다. 그러다 부르는 전화가 오면 쏜살같이 달려가 일한다. 끔찍하다!

희망이 아니라 비극적 전망을 해야 하는 건 잔인하다. 그러나 곧 다가올 현실이다. 문제는 그 몫이 주로 청년들의 것이라는 점이다. 잘난 어른들은 제 자식 그런 일 없게 여기저기 꽂을 테니 그럴 걱정 없겠지만. 그걸 방치하는 건 죄악이다. 다음 세대에게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상상해보라, 내 자식들이 휴대폰 들고 건물 주변을 배회하는 모습을. 그러면서 희망을 가지라고? 꿈을 가지라고? 꿈 꿀 시간도 없다. 근무 시간을 줄여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일할 시간을 늘여달라고 애걸하는 청년들에게 기껏 ‘제로아워’ 계약서를 내미는 현실을 그냥 받아들일 일이 아니다.

의제 설정과 방향성은 매우 중요하다. 같은 명제를 어떻게 의제화하느냐에 따라 천지차이로 달라진다. 10명이 하던 일에 AI와 로봇을 투입하면 2명이 감당할 수 있고 생산은 2배로 는단다. 그게 발전이다. 그런데 그 명제에서 도출하는 의제는 엉뚱하게 ‘쓸데없는 8명을 먼저 자르고’ 가는 것이다. 그게 아니다! 그 진보에 따라 10명이 돌아가면서 2명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여유 시간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다뤄야 한다. 남은 시간 더 놀고 더 생각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노는 게 무조건 비생산이 아니다. 놀며 생각하고 거기에서 영감과 창의력을 얻는다. 그게 다시 생산 활동에 투여된다. 그게 확대재생산이다. 자본의 투여만 확대재생산이라는 건 낡은 경제학의 산물이다. 그리고 2배로 늘어난 생산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분배해야 하는지 따져야 한다. 그리고 더 좋은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드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제4차 산업혁명 운운하며 그나마 지금 차지한 일자리 잃지 않으려면 입 다물고 일만 하란다. 공포와 두려움의 마케팅이다. 그건 오직 파국으로 가는 길이다.

예고 없이 올 전화를 기다리며 배회하는 ‘호출노동자’의 삶을 기정사실화하는 데에 앞장서는 흐름에 저항해야 한다. 그게 어른들의 몫이다. 자기네들은 단물 다 빨아먹고 다음 세대에게는 ‘어쩔 수 없어. 그게 현실이야.’라고 발뺌하는 비겁한 폭력을 멈춰야 한다. 비용절감을 무조건 ‘인건비’로 생각하는 단순무식한 사고를 깨뜨려야 한다. 생각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고 삶이 바뀐다. 혁명의 시대라면 먼저 제대로 사고의 혁명부터 시작해야 한다. ‘기업의, 기업에 의한, 기업을 위한’ 고용의 형태를 당연한 것으로 순응해서는 안 된다. 내 새끼들이 휴대전화 들고 전전긍긍하며 길거리를 배회하는 모습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게 제4차 산업혁명 운운하기 전에 고민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다. 우리는 모두 존엄한 ‘인간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래의 발전은 그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상이, 꿈이 아니다. 생각을 바꿔야 그게 현실이 된다. 인간은 모두 행복해야 한다.

혁명은 낡은 틀을 깨뜨리는 것이지 인간의 삶을 깨뜨리는 게 아니다. 혁명은 인간의 삶을 진화시킬 때 비로소 혁명의 가치를 갖는다. 그걸 놓쳐서는 안 된다. 폭동이 아니라 혁명을 원한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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