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를 찌르는 영리한 대사와 익살 맞은 슬랩스틱에 영화를 보는 내내 복근이 뻐근해지도록 웃었다. 웃음은 전염성이 강하다더니, 27일까지 300만 관객이 영화 ‘극한직업’을 봤다. 불과 개봉 5일 만이다. 주연 배우 류승룡(49)에게도 “역시 희극지왕”이라는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단언컨대, 류승룡의 완벽한 부활이다.
“이하늬, 진선규, 이동휘, 공명, 신하균, 오정세까지 출연 배우들 중 누구 하나 튀거나 뒤쳐지지 않는 조화로운 코미디라고 자부합니다. ‘웃음협동조합’이랄까요. 촬영이 끝나가는 게 아쉬울 정도로 즐거웠어요. 그 기운이 관객에게도 전해졌으면 합니다.” 최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류승룡은 어느 때보다도 자주, 환하게 웃었다.
‘극한직업’은 마약반 형사 5인방이 범죄 조직 아지트 앞 치킨집을 인수해 잠복 수사를 하다 그 치킨집이 돌연 맛집으로 소문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다. 류승룡은 실적 부진으로 번번이 승진에서 밀려난 마약반의 만년 반장 고 반장을 연기한다. 그는 “대사의 ‘말맛’이 살아 있는 시나리오가 너무나 반가워 흔쾌히 출연했다”고 말했다.
영화 속 대사처럼 “토막 살인범을 잡아도 모자랄 판에 매일 닭이나 토막 내고 있는” 웃지 못할 상황에 극중 인물들은 정체성 혼란을 느낀다. “시나리오가 촘촘하게 설계돼 있어서 배우들은 굉장히 진지하게 몰입해 연기했어요. 배우가 관객보다 먼저 웃으면 안 되잖아요. 주인공은 심각한데 관객은 웃음 터지는 상황극, 한마디로 ‘시치미 뚝 떼는’ 코미디를 지향했습니다.”
류승룡의 명대사는 영화에서 가장 큰 웃음을 책임진다.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고 반장이 수사 상황을 논의하다 치킨 주문 전화를 받고 자동응답기처럼 읊는 인사말이다. 입소문이 나 ‘2019년의 유행어’가 될 조짐이다. 류승룡은 “운명처럼 다가온 대사였다”며 “시나리오 받은 순간부터 그 억양으로 구사했는데 이렇게 반응이 좋을 줄 몰랐다”고 했다.
류승룡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대사의 리듬을 잡아낸다. 그의 코미디 연기는 충무로에 정평이 나 있다. ‘명량’(2014)과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최종병기 활’(2011) 등이 그에게 진중하고 강인한 인상을 입혔지만, 먼저 이름을 알린 건 ‘내 아내의 모든 것’(2012)과 ‘평양성’(2011) ‘퀴즈왕’(2010) 같은 코미디 영화였다. 스크린 진출 이전엔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를 5년간 공연했고, ‘코미디 대가’ 장진 감독의 연극 ‘택시 드리벌’ ‘서툰 사람들’ ‘웰컴 투 동막골’ 등에서 실력을 다졌다. 요컨대 그의 연기 뿌리는 코미디다. 류승룡은 “고 반장 역은 나에게 가장 잘 맞고 편하고 어울리는 옷이었다”며 “만날 구박받던 형사들이 필살기를 꺼내 보이는 엔딩이 평범한 우리를 위한 응원으로 다가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류승룡은 ‘7번방의 선물’(2013)과 ‘명량’ ‘광해, 왕의 된 남자’ 등 영화 3편을 1,000만 반열에 올리며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최근 ‘7년의 밤’과 ‘염력’(2018) ‘손님’ ‘도리화가’(2015)에선 잇달아 쓴맛을 봤다. 그 간극을 오가며 그에게 어떤 변화가 찾아온 걸까. 주변에서도 “처음 보는 얼굴”이라고 말할 만큼 여유롭고 편안해졌다. “그동안 저를 채찍질하기만 했어요. 연극에서든 영화에서든 관객을 위해서만 살았지, 정작 자신을 돌보지 않았던 거예요. 그러다 몇 년 전 혼자서 제주 올레길을 걸었어요. 숨소리,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오롯하게 자신에게 집중하니 감정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정리되더군요. 울컥 눈물 났어요. 비로소 인생을 바로 보게 됐고,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죠.”
수년 전 술과 담배를 끊은 류승룡은 3년 전부터 다도와 목공을 즐기고 있다. 여행가들과 해안 쓰레기 치우는 활동을 하면서 섬의 매력에 빠져 섬 여행도 자주 다닌다. 지난해엔 백두대간 문화 유산을 찾아가는 다큐멘터리를 3개월간 찍었다. 설 연휴 EBS에서 방영될 예정이다. “춤의 고수들은 힘으로 춤을 추는 게 아니더군요. 마치 승무의 춤사위처럼요. 여행을 하며 인생 고수들에게 많은 지혜를 배웠습니다.“
류승룡이 출연한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도 25일 공개됐다. 다음달엔 ‘킹덤’ 시즌2 촬영을 시작한다. 그는 “일의 총량은 비슷하지만 이전의 바쁨과는 분명 다를 것”이라고 했다. “내 삶이 윤택해야 나를 보는 사람들도 즐겁고 행복하다는 걸 알았어요. 함께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저 또한 행복하고요. 조금 더디더라도 나와 내 주변을 돌보며 살아가고 싶어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