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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려 책상서 버티던 습관, 글쓰기에 도움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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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려 책상서 버티던 습관, 글쓰기에 도움 됐어요”

입력
2019.01.28 04:40
수정
2019.01.28 13:27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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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첫 에세이집 낸 방송작가 출신 번역가 노지양씨

서울 사당동 작업실에서 만난 노지양 씨는 “번역가는 가장 집요한 독자”라면서 “좋은 책을 깊이 있게 읽고, 우리말로 다시 쓰며 책 쓰는 기술을 익혔다”고 말했다. 고영권 기자
서울 사당동 작업실에서 만난 노지양 씨는 “번역가는 가장 집요한 독자”라면서 “좋은 책을 깊이 있게 읽고, 우리말로 다시 쓰며 책 쓰는 기술을 익혔다”고 말했다. 고영권 기자

애서가들이 책 고르는 몇 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 믿고 보는 저자의 저서, 둘째 믿고 보는 저자가 추천하거나 인용한 저서, 셋째 출판사의 명망, 때때로 시의성. 취향 따라 기준 두는 비중의 차이는 있지만 이 포위망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해외 저자가 국내 독자를 만날 때, 번역자는 거름망 역할을 한다. 단지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는데 그치지 않는다. 이름난 번역자에게 번역할 책의 선택권이 주어지니, 이들이 택한 책과 저자는 기대를 저버리기 힘들다.

‘나쁜 페미니스트’와 ‘헝거’를 통해 록산 게이를, ‘여자라는 문제’를 통해 재키 플레밍을 국내 소개한 번역가 노지양(44)씨는 출판계 페미니즘 열풍으로 주가 높은 번역가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지난 달 에세이 ‘먹고사는 게 전부는 아닌 날도 있어서’(북라이프 발행)를 내며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작가가 됐다. 최근 서울 사당동 작업실에서 만난 노씨는 “언젠가 제 책을 쓸 거라 믿고 있었지만 제 마음대로 안됐다. 욕심이 없어졌을 때 기회가 왔다”고 말했다.

명문대 영문과 졸업, 라디오 ‘유열의 음악앨범’, ‘황정민의 FM 대행진’ 등 대본을 쓴 방송작가, 80권을 옮긴 15년차 번역가. ‘신인 작가’ 노지양씨의 이력이다. 일견 화려해 보이는 이 이력에 대해 그는 “작가를 하기에는 개성이나 창의력이 부족하고, 번역가만 하기에는 잡생각이 많았다”고 말했다. 소설을 쓰고 싶어 학부 졸업 후 대학원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한 학기를 다니고 ‘순수문학은 내 분야가 아니다’고 결론, 라디오 방송프로그램 구성작가로 들어갔다. 그는 “우연히 라디오 프로그램 서브 작가가 됐고, 콩트나 청취자 사연 소개 코너의 대본을 썼다. 말하듯 글 쓰는 법과 유머 감각을 배웠다”고 말했다. 청취자 사연을 곧이곧대로 대본에 쓰는 게 아니라 사연을 뼈대로 사건 순서를 바꾸고, 생략과 과장을 하고, 갈등과 반전을 만드는 기술을 익혔다.

첫 에세이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 도 있어서'를 출간한 번역가 노지양씨. 고영권 기자
첫 에세이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 도 있어서'를 출간한 번역가 노지양씨. 고영권 기자

번역가로 전향하며, 남의 나라에 수출할 만큼 책 잘 쓰는 1급 작가들의 “가장 내밀하고 집요한 독자”가 됐다. 1인칭과 3인칭이 장악할 수 있는 단어가 다르다는 걸, 구체적이고 솔직한 일화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걸 알게 됐다. 노씨는 “번역을 통해 몸으로 익힌 노동 윤리, 되든 안 되든 책상 앞에 앉아 버텨보는 습관이 글쓰기에도 분명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에세이에는 이런 경험이 듬뿍 담겼다. 책 내고 싶어 칼럼 실어줄 잡지를 찾아 헤매며 망신을 자초했던 기억을, 번역이 형편없다며 '백 번 천 번 생각해봐도 번역료를 다 드릴 수 없다'는 메일을 받았던 흑역사를, 글 잘 쓰고 책도 낸 경쟁자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견딜 수 없었던 지난 날을 풀어놓는다. 식당과 당구장이 있는 지저분한 2층 건물, 정육점 딸로 사는 것이 창피했던 경험을 통해 이 땅 40대들의 유년시절을 호출하는 장면은 이 책의 백미다.

‘엄마 아빠는 정육점을 했다. 도매업도 같이 했기 때문에 아빠가 길게 매달린 돼지의 껍질과 기름을 제거하다가 잘 드는 칼에 팔이 베이는 장면이라든가 가게 안쪽 커다란 기계에서 삼겹살 덩어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썰려 나오는 광경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장면들이 내 유년 시절 기억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 이제는 부모님의 언어와 나의 언어를 만나게 하고 싶다. 아빠가 밥상에서 부르던 목포의 눈물에 대하여,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단칸방에서 오열하던 엄마에 대하여, 아빠가 서울역에서 신문팔이를 했던 날들에 대하여, 언젠가 시집갈 딸들을 위해서라며 정육점을 그만두고 서점을 차렸다 망해버리고 그 자리에서 간판을 수없이 바꾸면서 구두를 팔고 와인을 팔고 위스키를 팔며 우리를 지켜주었던 부모님의 그 세월에 대하여.’(3장 ‘부모님의 언어’)

이 고백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뭘까. 노씨는 “글쓰기 의뢰가 오지 않아도 일상을 꾸준히 썼고 책의 문장, 영화 대사, 신문 기사나 인터뷰를 꾸준히 메모했다. (무엇이든 이루고 싶은 일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 하고 싶다는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해 봄 카카오 브런치에 일상을 연재했고, 출판사의 출간 제의를 받았다. 조만간 다른 출판사에서 러브콜을 받은 ‘나이듦’에 관한 책도 쓸 예정이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말고 계속 시도하고 경험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좌절도 충분히 하되 완전히 놓치는 말라고. 주변에 하고 싶은 일, 꿈에 대해 말하세요. 언젠가 뿌려놓은 말이 민망해서라도 시작하게 될지 몰라요.”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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