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기 준비는 안 하고 노래만 부른다는 비난을 받은 베짱이는 억울하다. 베짱이는 겨울이 오기 전에 알을 낳고 죽는다. 겨울을 나는 것은 성충이 아니라 알이다. 알이 겨울 동안 먹을 식량을 아빠가 미리 준비할 필요는 없다. 짝을 찾아 알을 낳는 것이 베짱이가 해야 할 일이다. 베짱이가 짝을 찾는 방법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 베짱이에게는 식량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것이 겨울을 준비하는 일이다. 여름에 열심히 노래를 부른 덕분에 숲 속 어딘가에는 베짱이의 알이 겨울을 나고 있다.
사람들만 살 것 같은 도시에도 다양한 동식물이 함께 살아간다. 추위를 견뎌야 하는 사람처럼 도시에 사는 동식물들도 각자의 방법으로 겨울을 이겨낸다.
꿀벌은 난방을 한다. 사람이 가스나 석유에서 에너지를 뽑아 열을 내는 것처럼, 꿀벌은 꿀에서 에너지를 뽑아 열을 낸다. 꿀벌은 서로 뭉쳐 보온을 하면서 온도가 떨어지면 날개 근육을 움직여 열을 낸다. 겨울이 오기 전에 열심히 모아두었던 꿀은 꿀벌의 입으로 들어가 ‘날개 근육 보일러’를 통해 사용된다. 벌집의 온도는 36도 안팎으로 유지된다.
꿀벌이 날개 근육 보일러의 연료를 모으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열매는 새가 겨울을 나는데도 도움을 준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도시에 많고 다양한 꽃나무를 심는다. 꽃나무는 열매를 맺고, 그 열매는 도시의 새들에게 좋은 먹이가 된다. 5월이면 나무 전체를 하얗게 뒤덮는 꽃을 피우는 이팝나무는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 최근에 많이 심어졌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가로수로 거의 심지 않았지만, 지금은 벚나무, 은행나무 다음으로 많은 가로수가 됐다. 한여름이 오기 전에 이미 열매를 땅에 다 떨어뜨리는 벚나무와 달리, 이팝나무는 가을에 익은 보라색 열매를 겨울 내내 가지에 달고 있다. 산새였지만 어느새 도시에서 친근한 새가 된 직박구리는 사람이 심어놓은 이팝나무 열매를 잘도 먹으며 겨울을 난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기호에 맞춘, ‘아름다움’을 위해 만들어진 식물다양성이 결과적으로 많은 산새들을 도시로 불러들였다. 특히나 산에 먹이가 부족한 겨울은 도시에서 산새를 보기 좋은 계절이다.
새들에게 열매를 내어준 많은 나무들은 낙엽을 떨어뜨린 채 겨울을 난다. 질소나 인 같이 쉽게 구할 수 없는 원소들은 잎을 떨구기 전에 줄기로 회수한다. 그리고나서 나머지를 떨어뜨린다. 강추위에 체내에 있는 물이 얼지 않도록 물의 농도를 높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바닷물이 쉽게 얼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를 이용해 겨울나무는 쉽게 얼지 않는다.
겨울이면 풀은 다 죽었을 것 같지만, 자세히 땅을 쳐다보면 초록이 보인다. 많은 풀들은 땅바닥에 딱 붙은 채로 추위를 견디며 겨울을 난다. 이를 로제트형 식물이라고 한다. 그렇게 냉이도, 개망초도, 질경이도, 도시에서 겨울을 난다.
곤충은 알, 애벌레, 번데기, 성충 중 하나의 형태로 겨울을 난다. 베짱이나 사마귀는 알로, 도토리거위벌레는 애벌레로, 대부분의 나방은 번데기로 겨울을 난다. 무당벌레는 성충으로 겨울을 나는 대표적인 곤충이다. 숲 속에 사는 무당벌레라면 두꺼운 낙엽층 아래나 나무틈 같은 곳에서 추위를 피하겠지만, 도시에 사는 무당벌레에게는 아파트 베란다가 따뜻하다는 소문이 이미 퍼졌다. 그러니 겨울 내내 쳐다보지도 않았던 작은 방 베란다를 열었을 때 수많은 무당벌레를 발견하고서 너무 놀라지 마시라. 겨울을 견디려 잠시 머무는 것이니.
‘대한'이 지났다. ‘겨울의 큰 추위’라는 뜻의 ‘대한’은 겨울 절기의 한복판에 있을 것 같지만 가장 마지막에 있다. ‘대한’ 다음이 ‘입춘’이다. 도시 속 많은 생명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얼마남지 않은 이 겨울을 이겨내고 있다. 우리 곁에서.
최성용 도시생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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