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3일 국민연금이 앞으로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를 적극 행사하겠다고 공언한 가운데,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산하 전문가 그룹인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자책임위)가 이날 예상을 깨고 이에 대해 반대, 엇박자를 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는 지난 16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총수 일가의 일탈 행위로 기업가치가 훼손된 대한항공에 대해 이사 해임 등 강력한 주주권 행사를 검토하기로 했지만, 23일 수탁자책임위에서는 위원 다수가 이에 반대 의견을 냈다.
수탁자책임위는 이날 오전 8시 서울 시내 모처에서 회의를 열어 대한항공과 한진칼에 대한 주주권 행사 여부와 범위를 논의했다. 가장 쟁점이 된 경영참여 주주권 행사(이사 해임, 사외이사 선임, 정관변경 등)에 대해서는 위원 9명 중 2명은 찬성하고 5명은 반대했다. 나머지 2명의 위원은 대한항공의 이사해임 및 정관변경엔 찬성하지만 사외이사선임 및 의결권대리행사 권유는 반대한다는 ‘부분 찬성’ 의견을 냈다. 강력한 주주권 행사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기류가 형성된 것이다. 찬성 측은 “주주 가치 제고를 위해 경영참여 주주권 행사가 필요하다”고 봤고, 반대 측은 “단기매매차익을 반환해야 하는 등 기금 수익성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수탁자책임위는 경영참여보다 더 낮은 단계인 ‘이사 연임 반대’와 같은 의결권 행사에도 합의하지 못했다. 수탁자책임위는 기금운용위 의결 없이 자체 판단만으로도 문제 기업의 이사 연임 반대 등 의결권 행사가 가능하다. 이날 회의에서 의결권 행사에 대해서는 찬성 의견이 많았지만 반대 의견이 워낙 거세 기금운용위원회에는 위원 개개인의 의견을 그대로 전하기로 했다는 후문이다.
수탁자책임위는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한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 시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전문가들이 의견을 제시하는 독립성을 강화한 기구이지만, 정작 위원들 간에는 정치적 공방만 되풀이된 것으로 알려졌다. 수탁자책임위의 한 위원은 “위원들 간 사안을 보는 시각차가 워낙 커 회의를 반복해도 이견을 좁힐 수 없다는 점만 깨달았다”고 말했다.
결국 대한항공에 대한 경영 참여 주주권 행사 여부나 의결권 행사 범위는 국민연금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가 다음달 초 결정해야 한다. 기금운용위는 보건복지부 장관(위원장)을 포함해 정부 위원이 6명(주요부처 차관 4명,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으로 전체(20명)의 30%에 달한다. 그만큼 정부의 의중이 중요할 수 밖에 없는데, 지난 16일 해당 안건 보고 당시는 관치 논란을 우려해 정부가 찬반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이 스튜어드십 코드 이행 의지를 적극적으로 밝혔지만, 수탁자책임위의 전문가그룹들이 예상 밖으로 이에 강하게 제동을 걸고 나오면서 결정을 내려야 할 기금운용위는 정부의 뜻을 따라야할지 전문가의 의견을 수용해야할지 적지 않은 고민거리를 떠안게 된 셈이다.
김지현 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김민호 기자 km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